일상 끄적이기

방구석 철학자의 밤 Ward

p5kk1492 2025. 5. 6. 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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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d 는 병동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정신적으로 힘든 삶을 겪었음에도, 깊은 발자취를 담긴 인물들의 어록을 살펴보고자 한다. 아래는 ChatGPT 의 답변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 본 글이다.

 

1. Friedrich Nietzsche (프리드리히 니체)

독일 철학자. 1844–1900.
신의 죽음을 선언하고, 힘에의 의지, 영원회귀 등의 개념을 통해 현대 철학과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889년부터 정신 이상 증세로 붕괴되어, 여생을 무력하게 보냈다.

어록 1:

“If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네가 오랫동안 심연을 들여다보면, 심연 또한 너를 들여다본다.”

ㄴ 선악의 저편에서 아주 유명한 아포리즘이다. 심연을 통해 세상에 대한 진리 한 가지를 알려주는 느낌이다. 사실 내가 심연, 즉 세상에 어둡거나 혹은 깊이 발을 담구었을 때 나만 그 것은 인지한게 아니다. 당신이 인지한 순간 반작용으로 그 심연으로 여겨지는 주체 또한 날 인지하게 된다.


어록 2:

“One must still have chaos in oneself to be able to give birth to a dancing star.”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내면에 혼돈이 있어야 한다.”
ㄴ 내면에 혼돈이 결국 창조적 자아를 만드는 촉매이다. 허나 내면의 혼돈을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으려면 강한 의지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2. Antonin Artaud (앙토넹 아르토)

프랑스 시인, 연극 이론가. 1896–1948.
극단적인 표현주의와 ‘잔혹극’ 이론으로 연극계에 영향을 줬으며, 정신병과의 싸움 속에서 수년간 입원 생활을 했다.

어록 1:

“I am not mad. I am alienated. There is a difference.”
“나는 미친 게 아니다. 나는 소외된 것이다. 둘은 다르다.”

ㄴ 소외와 광기는 다르다고 말하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싶다. 때론 소외됨이 광기를 낳기도 하는 거 같다고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어록 2:

“No one has ever written, painted, sculpted, modeled, built, or invented except literally to get out of hell.”
“누구도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하거나, 발명하지 않는다.”

ㄴ 인생을 고통이고 타인은 지옥이다. 이 지옥같은 곳을 빠져나가는 순간은 역시나 창의가 발휘되는, 결국 자기표현의 순간이 아닐까 싶다. 내가 글을 쓰려고 버둥거리는 이유이고, 유튜브에 그지같은 목소리를 남기는 것도 위와 같은 이유에서 비롯한다.




3. Ezra Pound (에즈라 파운드)

미국 시인. 1885–1972.
모더니즘 문학의 중심 인물. 파시스트 이탈리아 지지로 전쟁범죄 혐의를 받았고, 미국 정신병원(세인트 엘리자베스)에 12년간 수감되었다.

어록:

“All my life I believed I knew something. But then one strange day came and I realized I knew nothing. Yes, I know nothing.”
“내내 나는 뭔가를 안다고 믿었다. 그런데 어느 이상한 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ㄴ 국가나 사회에서 미쳤다고 개인에게 정의내리면, 그로 부터 미친자가 된다. 결국 내 자아에 대해 스스로 의심하게 되고, 나도 내가 미쳤음은 받아들이는 상황이, 저자와 같이 겪게 될 지도 모른다. 모두가 미쳤다고 하면, 결국 개인은 미친자가 된다.


4. John Nash (존 내쉬)

미국 수학자,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1928–2015.
비협조적 게임 이론을 창시. 조현병을 앓으며 여러 차례 입원, 환청과 망상 속에서도 학문 활동을 계속했다.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실제 모델.

어록 1:

“I wouldn’t dare say that I’ve been cured. But I can say that I am rational.”
“내가 나았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나는 이성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다.”

ㄴ 세상에 정신적으로 완전히 멀쩡한 인간이 과연 존재할까? 차라리 어느 순간에는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게 답일지도 모르겠다. 완전히 이성적인 인간도 없으니 말이다.


어록 2:

“Rationality of thought imposes a limit on a person’s concept of his relation to the cosmos.”
“사고의 합리성은 인간이 우주와 맺는 관계의 개념에 한계를 부여한다.”

ㄴ 합리적 사고로 인간 개개인을 규정하면 결국 우주적 관계를 맺는 것에 한계를 갖게 된다고 말한다. 사실 우주적인 관계성까지 생각할 여력은 나에겐 없지만, 사고의 합리성 너머에 우주의 공의가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은 든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이해가 되지만, 여전히 위의 내용은 어렵다.




5. Virginia Woolf (버지니아 울프)

영국 작가,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 인물. 1882–1941.
우울증과 조울증 증세로 고통받았으며, 강물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내면의식과 심리묘사에 탁월한 작가로 평가된다.

어록 1:

“I am rooted, but I flow.”
“나는 뿌리내렸지만, 흐르고 있다.”

ㄴ 양극성을 의미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뿌리내림과 흐름은 양 극단에 놓여이는 것인데, 이것이 상존할 수 있나? 인간은 양가감정을 지닐때가 있다. 아마 이를 생각해보면 수긍할 수 있는 어록이다.


어록 2:

“The mind is the most capricious of insects — flitting, fluttering.”
“마음은 가장 변덕스러운 곤충이다 —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흔들린다.”

ㄴ 마음은 변덕스럽긴 하다. 곤충에 비유한 것은 약간 혐오스러움을 가미한 것일까? 어쩌면 내 마음은 나랑 다른 자아를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Ward에서의 고통과 낙인찍힌 자의 삶“이라는 주제는 철학적·존재론적 사유를 자극하는 깊은 주제입니다.
다음은 철학적 질문 세 가지이며, 위에서 언급한 인물들의 삶과 고통, 그리고 낙인의 문제를 고려해 구성했습니다.



1. 나의 고통은 병인가, 목소리인가? Is my suffering a disease, or is it a voice?
• 아르토와 니체는 “광기”를 단순히 병으로 보기보다 존재의 표현이나 의미의 붕괴로 보았습니다.
• 이 질문은 “고통은 억제하고 치료해야 할 대상인가, 아니면 존재가 외치는 비명인가?“를 묻습니다.

ㄴ 가끔은 마음에서 외치는 비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꼭 마음의 병이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병이라는 고통으로 인해 삶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가끔은 몸에서 내가 무절제하게 질주하는 상태에 제동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2.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누가 설정하는가? Who defines the boundary between sanity and madness?
• 존 내쉬나 울프처럼 탁월한 이성적 사고와 깊은 내면의 병을 동시에 가진 사람은, 정상성의 기준 자체가 자의적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 이 질문은 사회의 낙인이 철학적으로 정당한지를 묻는 도전입니다.

ㄴ 사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보면 정신질환이 근대화를 거쳐서 생기면서 이들을 통제하고 구금하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기도 한다. 무조건 푸코의 책을 수긍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질병들은 질환으로 정의하고 치료받으면서 일상생활을 가능케 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허나 그 질환으로 진단하게 되고, 사회에 정신병자로 낙인이 박히면 여전히 시선은 좋지 않다.




3. 인간의 가치와 존엄은 이성의 온전함에 의존하는가? Is human dignity dependent on the integrity of reason?
• 니체는 이성을 넘어선 사유를, 울프는 흔들리는 마음 속에서의 미학을, 내쉬는 조현 속에서도 수학적 질서를 포착했습니다.
• 이 질문은 “정신질환 속의 인간도 여전히 존엄한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윤리적 사유로 이어집니다.

ㄴ 정신적인 고통 속에서도 창의가 태어난다. 유명한 인물들 뿐 아니라, 일반적인 사람들 중에 정신적 고통을 가진 이들도 세상과 자기 자신에게 발자취를 남길 기회를 주길 바란다. 여전히 세상에는 정상과 광기를 구분해서 격리하려는 배타성을 갖고 있다. 아무래도 광기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본다.



“Ward에 있는 나“라는 전제는 이미 세상의 경계 바깥에 있는 자로서의 고독, 고통, 그리고 사유의 조건을 내포합니다.
그 공간에서 방구석 철학자인 당신이 고통, 번민, 무료함 속에서 스스로에게 던질 만한 깊은 질문을 아래에 제안드립니다 


1. 내가 사라지면, 나의 고통은 함께 사라지는가? If I disappear, does my suffering disappear with me?
• 존재의 고통이 사라짐으로써 끝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기억이나 구조 속에서 지속되는가?
• 파운드와 울프의 생애처럼, 고통은 삶과 함께 끝나는가, 혹은 더 오래 흔적으로 남는가?

ㄴ 여기서 사라지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다만 우리가 덜 고통스러운, 소소한 자기 자신의 행복을 좇을 뿐이다. 사라짐으로 인해 고통이 끝나기는 커녕, 남은 이들에게 고통을 나눠주고 갈 뿐이다. 인생은 고통이다.




2.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가? Am I far enough from myself to understand myself?
• 방 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자신을 ‘바깥’에서 보려는 시도.
• 니체와 내쉬처럼, 광기 속에서도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가?

ㄴ 항상 나 자신에 내면 세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철학은 내 탐구에 대한 나침반이 되어 주기도 한다. 좋은 문학작품, 그리고 내가 기존에 학습한 역사를 통해 찬찬히 날 들여다본다. 내 안의 심연을 마주하고, 이미 날 쳐다본 내면의 깊은 자의식속에 상처 혹은 고통을 찾아봐야 한다.




3. 고통이 나를 만든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원망할 수 있는가? If suffering made me who I am, do I have the right to resent it?
• 고통은 원수인가, 창조자인가?
• 아르토처럼 지옥을 통해 표현을 얻은 이에게, 고통은 어떤 얼굴인가?

ㄴ 고통을 원망할 수 없다. 고통은 그저 찾아오는 것도 있지만 내가 고통스러운 나자신을 더 채찍질 하기도 한다. 고통받는 영혼과 그 영혼 속 악마 모두 내가 자초한 것이 아닐까. 결국 인생은 고통의 역사이기에, 나는 그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내면을 살펴야 한다.




정신적인 고통은 외부로 봤을 때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외상과는 달리 주변에서 티를 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티를 내도 타자는 적확하게 누군가의 내면의 고통까지 염려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 한두번은 격려해줄 수 있지만, 그 이상되면 그들도 피로감을 느낀다. 그래서 결국 고통을 겪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덜 고통스러운 삶, 소소한 행복을 느끼며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어려운 일임에도, 나 자신이 바뀌지 않으면 마음의 지옥, 거대한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제 아무리 넓은 공간이나 시간적 여유에도 정신적 고통을 해결하지 않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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