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2부 어머니 <어머니의 모습>

p5kk1492 2024. 10. 6. 0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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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어머니의 모습

 

새집 처녀는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 고개가 환해진다

어머니 처녀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했다는 말

막내 이모가 들려주곤 했

 

어머니를

미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인물로

어찌 소박을 맞았을까 하

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미인이라 생각

하지 않았다

목이 짧았고 키도 작았던

어머니는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 윤곽이 너무 뚜렷했

으며

쌍꺼풀 진 큰 눈에

의미를 담은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때도

왠지 나는 그것이 슬퍼

보이질 않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현실적

인 사람이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인지

세웠다 접었다 하는

백동 장석의 작은 거울 

앞에서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빗고

달비 하나 키워서

검자주색 감댕기 감고 또

감아

쪽을 졌던 어머니

그러나 한 번도 셋째 이

모 쪽머리같이

예쁘게 보이진 않았다

화장은 안 했으며

대개는 세수로 끝내었는

살결은 희고 고왔다

 

한때 피륙 장사를 했던

어머니는

옷감에 대한 안목이 높았

허드렛일할 때의 옷 말고

최상급의 천으로 옷을 지

어 입었다

신새벽 절에 갈 때

목욕재계하고 갈아입던

바지며 단속곳도 모두 명

주였으며

여름에는 철기 날개 같은

모시옷

봄 가을에 관사 숙고사

자미사

겨울에는 법단 양단 호박

단 같은 것

한겨울 아주 추울 때는

세루 옷을 입었다

덕택에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가 동이 났을 때

나는 용감하게

어머니 세루 치마에 가위

질하여

양복을 지어 입었다

 

어머니가 입는 옷 색깔은

정해져 있었는데

흰색과 회색 

어쩌다가 고동색 치마를

입기도 했지만

딱 한 번 어머니는

무색옷을 입은 적이 있었

자주색 바탕에 흰무늬가

있는 스란치마와

하늘색 은 조사 깨끼저고

리였다

다소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던 시기

내 기억으론 그떄

한 번 무색옷을 입었던

것 같다

 

사연이 좀 긴데...

그러니까

나라가 망하고 외갓집도

쇠락했을 무렵

멀어진 친척과의 촌수를

잡아당겨

오가며 지내던

간창골 할아버지 댁과 조

금 관련이 있다

늙어서도

들꽃같이 애잔한 향기를

간직한 할머니

미장부의 흔적과

기개가 도도했던 할아버

그 댁엔 파초가 여러 그

루 있었다

어머니는 간창골로 이사

한 후 

친정처럼 그 댁을 의지하

고 살았다

나에게도 그 댁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

선비 집 생활의 높은 격

조를

내 마음에 심어 준 곳이

당시 동경 유학을 준비

중이던 그 댁 삼촌은

초등학교 육학년인 나를

공부도 지지리 못한 나를

상급 학교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를 설득했다

마치 새로운 돌파구라도

찾은 듯

그때부터 어머니는

삼촌의 의견을 수납하고

내 뒷바라지에 착수했다

그 하나가 

따뜻한 도시락을 마련하

내가 과외 공부를 하는

교실을 찾는 일이었다

일본인 여선생은

훌륭한 어머니라고 칭찬

했고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

리며 웃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 하고

잊지 못하는 일은

회색 세루 치마와 저고리

를 입고 온

어머니의 모습이다

비싼 천이어서 그랬는지

품을 넓게 잡아 지은 옷

우장을 쓴 것 같기도 했

추워서 그랬는지 부웅새

같기도 했다

 

ㄴ토지라는 장편중의 장편을 쓴 작가 답게 시가 장편소설같다. 쓰다가 이 내용을 옮겨 적는게 맞는지 고민했다.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을 담은 에세이를 시의 형식으로 남긴 것 같다. 앞으로 어머니에 대한 테마로 다뤄질 시들이 이처럼 길다면, 옮겨적는게 의미가 있는지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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