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어머니의 모습
새집 처녀는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 고개가 환해진다
어머니 처녀 시절에
동네 사람들이 했다는 말
을
막내 이모가 들려주곤 했
다
어머니를
미인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저 인물로
어찌 소박을 맞았을까 하
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미인이라 생각
하지 않았다
목이 짧았고 키도 작았던
어머니는
내 마음에 드는 모습이
아니었다
얼굴 윤곽이 너무 뚜렷했
으며
쌍꺼풀 진 큰 눈에
의미를 담은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고
그 눈에서 눈물이 쏟아질
때도
왠지 나는 그것이 슬퍼
보이질 않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현실적
인 사람이었다
시집올 때 가져온 것인지
세웠다 접었다 하는
백동 장석의 작은 거울
앞에서
동백기름을 발라 머리를
빗고
달비 하나 키워서
검자주색 감댕기 감고 또
감아
쪽을 졌던 어머니
그러나 한 번도 셋째 이
모 쪽머리같이
예쁘게 보이진 않았다
화장은 안 했으며
대개는 세수로 끝내었는
데
살결은 희고 고왔다
한때 피륙 장사를 했던
어머니는
옷감에 대한 안목이 높았
다
허드렛일할 때의 옷 말고
는
최상급의 천으로 옷을 지
어 입었다
신새벽 절에 갈 때
목욕재계하고 갈아입던
바지며 단속곳도 모두 명
주였으며
여름에는 철기 날개 같은
모시옷
봄 가을에 관사 숙고사
자미사
겨울에는 법단 양단 호박
단 같은 것
한겨울 아주 추울 때는
세루 옷을 입었다
덕택에 태평양전쟁 말기
물자가 동이 났을 때
나는 용감하게
어머니 세루 치마에 가위
질하여
양복을 지어 입었다
어머니가 입는 옷 색깔은
정해져 있었는데
흰색과 회색
어쩌다가 고동색 치마를
입기도 했지만
딱 한 번 어머니는
무색옷을 입은 적이 있었
다
자주색 바탕에 흰무늬가
있는 스란치마와
하늘색 은 조사 깨끼저고
리였다
다소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던 시기
내 기억으론 그떄
한 번 무색옷을 입었던
것 같다
사연이 좀 긴데...
그러니까
나라가 망하고 외갓집도
쇠락했을 무렵
멀어진 친척과의 촌수를
잡아당겨
오가며 지내던
간창골 할아버지 댁과 조
금 관련이 있다
늙어서도
들꽃같이 애잔한 향기를
간직한 할머니
미장부의 흔적과
기개가 도도했던 할아버
지
그 댁엔 파초가 여러 그
루 있었다
어머니는 간창골로 이사
한 후
친정처럼 그 댁을 의지하
고 살았다
나에게도 그 댁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넉넉한 형편은 아니었지
만
선비 집 생활의 높은 격
조를
내 마음에 심어 준 곳이
다
당시 동경 유학을 준비
중이던 그 댁 삼촌은
초등학교 육학년인 나를
공부도 지지리 못한 나를
상급 학교에 보내야 한다
고
어머니를 설득했다
마치 새로운 돌파구라도
찾은 듯
그때부터 어머니는
삼촌의 의견을 수납하고
내 뒷바라지에 착수했다
그 하나가
따뜻한 도시락을 마련하
여
내가 과외 공부를 하는
교실을 찾는 일이었다
일본인 여선생은
훌륭한 어머니라고 칭찬
했고
어머니는 손으로 입을 가
리며 웃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 하고
잊지 못하는 일은
회색 세루 치마와 저고리
를 입고 온
어머니의 모습이다
비싼 천이어서 그랬는지
품을 넓게 잡아 지은 옷
은
우장을 쓴 것 같기도 했
고
추워서 그랬는지 부웅새
같기도 했다
ㄴ토지라는 장편중의 장편을 쓴 작가 답게 시가 장편소설같다. 쓰다가 이 내용을 옮겨 적는게 맞는지 고민했다. 내용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 혹은 추억을 담은 에세이를 시의 형식으로 남긴 것 같다. 앞으로 어머니에 대한 테마로 다뤄질 시들이 이처럼 길다면, 옮겨적는게 의미가 있는지 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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