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sement Philosopher’s Night
🌓 오늘의 주제: 용서 (Forgiveness)
📖 성경에서의 용서 – Matthew 6:14-15 (NIV)
“For if you forgive other people when they sin against you, your heavenly Father will also forgive you. But if you do not forgive others their sins, your Father will not forgive your sins.”
“너희가 사람들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구절은 용서가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 아니라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요소임을 강조합니다.
This passage highlights that forgiveness is not just a personal emotion but also a crucial element in the relationship between God and humans.
🧩 철학자들의 아포리즘: 용서에 대한 단상
Philosophical Aphorisms on Forgiveness
1. 니체 (Friedrich Nietzsche)
“용서는 망각으로 이어질 수 없다. 기억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Forgiveness cannot lead to forgetting, because memory remains alive.”
→ 우리는 정말 용서할 수 있는가? 혹은 단순히 ‘잊는 것’일 뿐인가?
→ Can we truly forgive, or do we simply forget?
용서 받고 싶다고 하더라고, 용서를 하는 주체가 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용서한다고 해서 나에 대한 기억을 잊을 수 없기에, 그는 진정으로 나를 용서할 수 없고, 나는 용서 받을 수 없다. 용서하나 잊지않겠다는 말이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정부의 사죄를 이스라엘이 위와 같이 답변했다. 망각할 수 없는 아픈 기억이 용서받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과연 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내가 용서의 주체라면, 기억을 하곤 있더라도 트라우마 수준의 상처를 타자에게 받은 기억은 없다.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망각은 커녕 희석되지 않는 깊은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면, 과연 그를 진정 용서할 수 있을까? 이렇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정말 용서받을 가능성이 낮다.
2.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
“용서란 과거를 바꿀 수 없는 인간이 미래를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Forgiveness is how humans, who cannot change the past, make the future possible.”
→ 용서는 과거의 상처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선택인가?
→ Is forgiveness a way to move forward rather than erase past wounds?
용서를 하는 주체가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상처로부터 한걸음 나아가기 위한 결정으로 용서를 한다면, 나는 용서를 구했을 때 상호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 나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받고, 용서하는 주체는 자신의 과거를 딛고 미래로 나아가게 된다. 여기서도 용서를 하는 주체의 결단이 필요하지, 내가 용서를 바란다고 해서 성립하는 조건이 아니다.
다만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이 격언에 대해 새겨둘 필요가 있다고 본다.
3. 자크 데리다 (Jacques Derrida)
“진정한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True forgiveness is forgiving the unforgivable.”
→ 정말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우리는 용서를 말할 수 있을까?
잘못은 어린시절일 수록 정말 용서할 수 없는 것일지도, 누군가에게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왜 내가 받은 상처에 대해, 씻을 수 없는 괴로움을 용서하는가. 이에 대한 결단 또한 용서하는 주체에 달려있다. 용서받고자 하는 이에게는 선택권이 없는 명제다.
→ If something is truly unforgivable, can forgiveness even exist?
4. 시몬 베유 (Simone Weil)
“용서는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Forgiveness is setting oneself aside to create space for the other.”
→ 용서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인가, 타인을 위한 것인가?
→ Is forgiveness ultimately for ourselves or for others?
타인을 위한 공간이 용서하는 주체에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용서를 빌겠다. 사실 용서하는 주체는, 나에 대한 기억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내려놓음이 더 어려운 일이다. 자신이 그때로 돌아가서 회상했을 때, 자신이 용서할 대상을 위해 공간을 만들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을까.
굳이 따지자면 자기 자신을 위한 길이다. 허나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은 관용을 베푸는 행위다. 용서는 참으로 큰 결심이다. 용서를 바라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해당 주체에 대해 설득의 논리를 내세울 수 없다. 그래서 이 또한 용서하는 주체에게 주도권이 있다.
5. 장 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
“우리는 항상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용서조차도.”
“We can never escape the gaze of others, even in forgiveness.”
→ 용서란 궁극적으로 타인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해방을 위한 것인가?
→ Is forgiveness for others, or is it about liberating ourselves?
결국 나와 당사자간의 문제라고 하기엔 우리는 실존적 주체로서 상호작용이 노출된다. 용서하는 주체와 대상 모두가 주변부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용서하는 주체 또한 쉽사리 용서하기 어렵거나 고민스러운 지점일 것이다. 용서받고자 하는 대상 또한 전적으로 해당 주체에게 잘못을 뉘우침으로 보여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진심인지는 주체는 의심할 수 있다. 타자의 시선 때문인지, 진정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인지 의심할 수 밖에.
🔎 오늘의 철학적 질문: 용서란 무엇인가?
Philosophical Questions on Forgiveness
1. 나는 정말로 용서받을 수 있는가?
Can I truly be forgiven?
→ 용서는 타인의 인정이 필요한가, 아니면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가?
→ Does forgiveness require recognition from others, or can I decide it myself?
영화 밀양에서 유괴살해범을 용서하기 위해 신앙을 가지고 난뒤, 면회를 신청한 여주인공이 충격을 받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을 용서하기 위해 결단을 한 그녀는, 이미 자신은 하나님에게 용서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유괴살해범의 태도에 경악한다. 그녀는 혼절하고, 그뒤로 그녀의 태도는 신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누가 용서를 하는가. 용서하는 주체가 결심하기도 전에 내 스스로 용서받음을 결정할 수 있는가? 절대자의 이름을 빌어 용서받았다고 하는 것은 해당 주체를 배제한 스스로의 독단이다. 나는 용서의 주체가 나를 진정으로 용서하기 전에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용서를 하는 주체를 죽을 때까지 마주할 수 없다면, 나는 용서받았다고 선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가 나로 인해 괴로웠던 부분에 대해서 극복하고 혹은 기억 저편에 망각에 가까운 상태가 되어 잊혀져있길 바랄 뿐이다. 나로 인해 더이상 괴로워하거나 괘념치 않길 바라며, 그렇다고 해서 내가 용서받았다는 생각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절대자의 이름을 참칭해서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2. 용서는 단순한 감정인가, 아니면 윤리적 의무인가?
Is forgiveness merely an emotion, or is it a moral duty?
실존이다. 나와 타자가 관계맺음으로 인해 나는 용서를 구하고, 타자는 용서를 해야하는 상태다. 이러한 실존적 갈등에서 나와 타자는 더이상 관계맺음이 끊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더이상 용서를 구하고자 하는 나는 표류하고, 타자는 나를 용서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래서는 끊임없이 용서를 구한다. 이것이 감정일까? 윤리적 의무일까? 나는 이것이 실존이라고 본다. 나의 행동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이 상대와의 관계맺음이 끊어지더라도, 타자의 용서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용서에 대해 실존적 물음을 반복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용서는 실존이다.
→ 우리는 용서해야 할 의무가 있는가, 아니면 용서는 선택인가?
→ Do we have an obligation to forgive, or is it a choice?
용서는 용사하는 주체의 판단이다. 그에게 용서해야할 의무도 없고, 용서해야 할지 말아야할지 꼭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용서를 구하는 대상에 대해 판단할 뿐이다.
3. 진정한 용서는 가능한가?
Is true forgiveness possible?
→ 만약 어떤 상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 If wounds never truly heal, can we ever genuinely forgive?
상처는 아물더라도 흉터가 남는다. 심각한 상처는 트라우마를 남긴다.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용서를 구하는 입장에서, 내가 타자에게 준 상처에 대해 나도 함께 기억하고 안고 가야한다. 내가 아무리 기억하고 잘못을 뉘우치더라도, 타자가 받은 상처의 흉터와 트라우마에는 미치지 못한다.
4. 내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나는 무엇을 용서하는가?
When I forgive someone, what exactly am I forgiving?
→ 타인의 행동을 용서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 자체를 용서하는가?
→ Do we forgive actions, or do we forgive the person themselves?
살아오면서, 나 또한 여러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대뇌이게 된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힘든 일을 겪으면, 사실 용서를 한다기 보다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나도 용서를 한다고 말하기 민망한 상황이 요즘 연출된다. 그냥 애써 외면한다. 회피한다. 왠만하면 마주지치 않으려고 하고, 최대한 그 공간에서 더이상 마주치지 않는곳으로 도망친다. 그게 용서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더이상 나와 타자와의 관계맺음은 중단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나는 용서의 주체라고 생각을 하지만, 상대방은 자신이 용서받을 만한 행위 자체를 한 적도 없고, 그게 왜 용서를 구해야할 일인지 조차 모르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가 왕왕 발생하기 때문에, 내가 만약에 누군가에게 용서를 하기 이전에 어던 행위에 대해서 괴로움이 남아있다면 그저 외면한다. 상대방과의 관계맺음을 끊는다. 그것이 나의 실존적 행위이기도 하고, 용서에 서툰 내가 취하는 방식이다.
🎶 오늘의 산책길을 위한 철학적 사유
Philosophical Reflection for Your Walk
이 질문들을 마음속에 품고 걸으며, 용서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사유해보시길 바랍니다.
Carry these questions with you as you walk and reflect on what forgiveness means to you.
나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나는 정말 용서할 수 있는가?
Can I be forgiven? Can I truly forgive?
용서라는 주제로 철학적 사유를 한 이유는, 친구가 내가 예전에 학창시절 학우를 괴롭혔다고, 그 친구가 널 용서하겠냐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한 친구나 나나 그 학우와는 연락을 하고 지내진 않는다. 내가 예전에 해당 학우를 괴롭힌 것은 사실이다. 이유는 그가 기독교도 였기 때문이다. 이유없이 기독교를 믿는다고 괴롭히진 않는다. 해당 학우와 나, 그리고 다른 한 친구가 불자였다. 불자 녀석이 기독교 친구 앞에 자신의 팔찌를 툭 던졌다.
그때 그 기독교 친구 녀석이 해당 팔찌를 혐오하듯 책상옆에 밀어냈다. 가볍게 밀어냈지만, 표정이 불쾌하다는 인상이었다. 당시에 나는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짙었다. 아니 적당한 수준의 기독교도는 상관없지만, 기독교 특유의 배타성을 드러내면 나도 좀 괴물같이 변하는게 있었다. 아무래도 그 친구를 타겟으로 공격적인 조롱을 했던 시점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자기비하를 소재로 광대가 되는 타입이다. 헌데 그친구에게는 해당 태도에 대한 반발로, 그 친구에게 만큼은 가학적인 개그의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친구도 웃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자신을 조리돌림하는데 증오가 쌓여왔을 것이다. 그러한 과정에도 그친구와 나, 불자녀석 셋은 어울려 다녔겠지만, 아마도 억지로 다녔을게 뻔하다. 그렇게 셋이라도 뭉쳐다니는 재미와, 나의 대한 증오의 감정이 아마 양가적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이래서 내가 그동안 심한 장난이나 조롱을 했던 점, 그친구를 희생물 삼아 개그를 했다는 식으로 표현을 순화해왔다. 나도 모르게 가해자란 표현을 피하고 있다는 점을 오늘 제3자의 친구녀석을 통해 절실히 느꼈다. 이제는 용서를 구하려고 해도, 용서하는 주체와 연락할 수도 없는 상황이지 않은가. 상대는 이제 겨우 나에 대한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이제는 나로 인해 괘념치 않는 삶을 살아가길 바랄뿐이다.
어느날 문득 그와 연락이 되어 상대가 사과를 요구하고 용서를 빌라고 한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용서를 구하고 사과를 할 생각이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공염불은 의미가 없다. 그가 용서하는 주체로서 판단하고, 날 용서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나는 앞으로도 내가 한 행동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를 대뇌이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한 행동이 어쩌면 칼로 찌르는 것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을 것이다. 세치 혀로 사람을 죽이는 일들이 한국에서 자주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자살이란 이름으로 세치 혀를 놀린 사람들은 범죄 혐의에서는 벗어난다. 세치 혀로 하는 살인, 나도 어쩌면 살인 미수에 대한 하는 죄악을 저지른 인간이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타인을 지옥을 떨어트린 자가 지옥을 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한 줄기 빛처럼, 오늘 밤의 사색이 의미 있는 통찰로 이어지길 바랍니다. 🌙
Like a beam of light emerging from darkness, may tonight’s contemplation lead to meaningful in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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