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1부 옛날의 그 집 <홍합>

p5kk1492 2024. 9. 29.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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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홍합

 

통영 항구의 동춘 끝을

지나고

해명 나루 지나고

작은 통통배

용화산 뒤편을 휘돌아 가

첫개라는 어촌이 있었다

인가가 몇 채나 되는지

희미해진 기억

푸른 보석 같은 물빛만은

지금도 눈에 어린다

 

친지 집에서는 내가 왔다

큰 가마솥 그득히 홍합을

삶아 내어

둘러앉아서 까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

던 홍합

그때처럼 맛있는 홍합은

이후 먹어 본 적이 없다

 

내 나이 열두 살이나 되

었을까?

어린 손님은

큰집에서 극진한 대접을

받았고

잠은 작은집에서 잤는데

아제씨는 어장에 가고 없

었다

호리낭창한 미인형의 아

지매는

병색이 짙어 보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두런거리는 소리

가 났다

집 안에 불이 밝혀지고

발자욱 소리도 들려왔다

덩달아 파도 소리도 들려

왔다

알고 보니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다

는 것

 

날이 밝고 보다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폐결핵인 아지매의 약으

고양이 새끼의 탯줄이 필

요했고

아지매는 고양이를 달래

고 달래어

탯줄을 얻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냐고도 했

첫개라는 어촌의 하룻밤

홍합과 아지매와 고양이

얼마 후 나는

아제씨가 상처했다는 소

식을 들었다

 

ㄴ 어촌에 사는 친지에서 맛있는 홍합, 병색이 짙었던 아지매 그리고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추억처럼 시가되어 그려지고 있다. 이번 시는 무언가 풍경과 함께 한 여인의 병색이 짙은 모습과 사연이 그려진다. 마지막에 고양이 탯줄이라는 지푸라기와 같은 심정의 약재료와 함께 한문장으로 정리하는 아지매의 죽음을 표현한 문구가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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