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1부 옛날의 그집 <우주 만상 속의 당신>

p5kk1492 2024. 10. 3.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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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우주 만상 속의 당신

 

내 영혼이

의지할 곳 없어 항간을 떠돌고 있을 때

당신께서는

산간 높은 나뭇가지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뱀처럼 배를 깔고 갈밭을 헤맬 때

당신께서는

선마루 헐벗은 바위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영혼이

생사를 넘나드는 미친 바람 속을

질주하며 울부짖었을 때

당신께서는 여전히

풀숲 들꽃 옆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진작에 내가 갔어야 했습니다

당신 곁으로 갔어야 했습니다

찔레 덩쿨을 헤치고

피 흐르는 맨발로라도

 

백발이 되어

이제 겨우겨우 당도하니

당신은 아니 먼 곳에 계십니다

절절히 당신을 바라보면서도

아직

한 발은 사파에 묻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겠습니까

 

ㄴ 저자의 삶을 안다면, 아마 절대자란 존재가 원망스럽기도 할 것이고 한편으로 경외하지 않을까 싶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와 절대자와의 거리감이 가까워진다는 마지막 문구, 그리고 여전히 삶이란 퇴적층에서 한 말을 담고 있다는 표현이 참 탁월하다. 나는 절대자에게 경외하는 마음은 가졌지만, 오랜시간 절대자를 기반으로한 인간들의 종교에 대해서는 증오와 혐오에 다까운 비판을 해왔다.

 

나에게 기독교적 신앙의 유일신 이전에 동양적 천명이 존재했다. 그렇게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정하는 무종교자로 살아가다 인생의 파도같은 거대한 시련을 겪다보니 천주교적 세례를 받기로 결심했다. 나같은 미천한 인간은 이성과 과학의 논리만으로는 세상 풍파를 견디긴 어렵더라.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처럼 절대자의 품으로 들어가길 택했다. 죽음의 이르는 병은 견디겠으나, 고독보다 무서운 시련을 견딜 힘은 없기에, 난 백발이 되기전에 당신께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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