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22/01/04 세 갈래 길, 레티샤 콜롬바니 여성 그리고 삶

p5kk1492 2022. 1. 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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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반에 대해 다루기 때문에 감안하시길 바랍니다.

 

책 표지

   최근에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2013년 이후에 거의 놓았던 책 읽기, 2016년에는 아예 취미는 유튜브 시청과 나무 위키 검색, 구글링이 전부인 삶에서 조금은 소중하게 간직했던 독서라는 좋은 습관을 다시금 열어젖혀 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독서모임을 통해서 읽게 되는 책을 통해서 조금씩 책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 보고자 합니다.

 

  첫 독서모임이 끝나고 담소를 나누던 중 서로 책을 추천하는 분위기가 열렸습니다. 저는 뭐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침묵하고 듣기만 했죠. 그러던 중 '세 갈래 길'이란 책, 이고 '인도 여성' '달리트'란 단어가 귀에 꽂혔습니다. 개인적으로 인도인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던 게 있었고, 그러던 중에 이 책은 왠지 인도인의 부조리한 삶을 그리고 있을 거란 느낌이 왔습니다. 그래서 바로 전차책으로 있는지 확인했고, 구매했습니다.

 

"새로운 생은 언제나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에서 시작된다."

 

  책 소개로 나오는 문구인데, 뭐 어찌 보면 괜찮은 문구로 보입니다. 저도 나름 인생의 위기, 서울생활에서 자빠진(?) 뒤 도망치듯, 호주와 캐나다로의 '추노'인생을 살면서 나름 빛을 본 경험이 있기도 했으니까요. 뭐 현재는 제주도 유배생활입니다만.

 

  초반에는 그들의 삶이 극적인 부분으로 위기를 맞이하는 면에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는데 결말 부분은 다소 미흡하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나름의 열린 결말로 마무리 짓는 점이 오히려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스미타의 그 여정이 놀랍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이면서 최하위의 신분인 달리트, 게다가 남편 나가라잔의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과 자신의 딸의 미래를 위해 북인도에서 남인도까지 가는 그 여정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1724Km 기차로 2일이라지만, 인도의 여건을 생각하자

  북인도의 바들라푸르에서 남인도의 첸나이, 이건 단순히 거리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전반을 갈아엎는 실험이고 모험이다. 남인도는 피부색, 바나로 구분하는 개념이 약해서 카스트가 조금 관대하다는 설명도 존재한다. 다만, 우리가 아는 카스트는 바나(4대 카스트)이고, 자티가 심각하다. 피부색으로 구분하는 것과 동시에 패밀리 네임으로 상대의 직업(자티)과 카스트를 확인하는 과정이 인도 사회에 존재한다. 그리고 같은 달리트끼리도 차별하고, 달리트 밑에 달리트도 존재한다고 한다. 

 

호주살이 떄 여정, 스미타와는 비교불가

  약 1700km라는 대장정을 대략적으로 느껴보려고, 예전 내가 호주살이 할 때 좋은 오 지잡의 기회를 잡으려고 똥차를 끌고 1300km의 여정을 경험한 것이 떠올랐다. 스미타는 그녀의 딸 랄리타와 함께 열악한 기차 환경을 견디며 간 것이고, 나는 뭐 비록 도착 후에 생을 마감한 똥차, 그래도 편안한 기회가 보장된 환경으로 간 것이기에 당연히 비교가 불가하다. 다만 그 먼 거리에 대한 경험적 측면으로 스미타의 놀라운 여정을 감상했다.

 

  북인도 바들라푸르에서 바라나시 그리고 남인도 티루파티 사원까지의 여정, 1700km에 다다르는 그 대장정, 물론 첸나이가 목적지였지만, 정말 그 험한 여정을 견디고 사원에서 성스러운 의식 비슈누 신을 위해 자신과 딸의 머리카락을 바치는 마무리가 인상적이다.

 

  최악의 신분, 다른 집안의 변을 치우는 것을 업으로 살아야 하는 스미타, 그녀의 딸마저도 그 삶을 이어가야 한다는 그 상황을 바꾸기 위한 선택, 그리고 아버지의 건강악화와 동시에 가업의 위기, 그리고 가족의 위기로 이어지는 시칠리아의 줄리아, 여자라는 젠더적 한계를 능력과 노력이라는 무기로 유리천장을 뚫어낸 몬트리올의 로펌 변호사 사라 코헨이 주인공이다.

 

  이 세 사람의 이야기를 마치 영화 속 시점 전환처럼 에피소드를 삼분할 해서 소설은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다른 세 여성, 그러나 각자의 위치에서 위기를 맞이하고 그 부분을 챕터별로 나눠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점이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스토리를 마치 카메라 시점을 전환하듯 스미타 한번 줄리아 한번 사라 한번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어서 더욱더 재미있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 마디마디 끝날 무렵에 마지막 문구가 인상적이어서 항상 메모를 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이 소설의 원제의 의미는 여성의 머리를 세 갈래로 나뉘어 묶는 형태의 머리를 의미한다. 어떤 소재 하나를 매개로 이 세 여성의 위기와 그 극복, 새로운 시작이 어떤 하나의 연결고리로 묶어주는 소설적 장치를 갖는다. 그 장치란 머리카락, 정확히 말하자면 티루파티 사원에서 나오는 인도인들의 머리카락이 그 연결점이다. 스미타는 비슈누에게 자신과 딸의 머리를 바치면서, 줄리아는 시크교도 남성인 카말지트 싱의 조언에 따라 인도인의 머리카락을 수입하며, 사라 코헨은 항암치료과정에서 신체적으로 무너지는 자신, 특히 머리를 위해 인도산 가발을 사면서 이 이야기는 나름의 묶음을 시도한다. 개인적으로는 딱히 와닿는 묶음은 아니다만, 나름 이렇다.

 

  여성주의 관점의 소설이라고 볼 수 있으나, 꼭 여성주의가 아니더라도 여성, 사회적 약자라는 시점으로 확장해서 감정을 이입해 본다면 남성일지라도 어느 정도는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스미타라는 여성의 삶 달리트, 불가촉천민이라는 신분적 지위, 변을 치우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신분이라는 특징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얼마나 열악하고 최악의 상황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개인적으로 스미타가 몰입이 되는 이유다.

 

  특히 인도의 사회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나 배경지식은 인도라는 나라가 성장하고 있는 나라이면서 동시에 열악학 인권의식이나 여전한 신분사회임을 알아갈 수 있는 장소라는 점도 다시금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한국이라는 나라의 거울일지도 모른다. 끊임없이 성장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화 속에서 개인의 삶은 행복하지 않은 노력과 성공이 일종의 카스트가 되어가는 우리의 사회도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인도만큼 씹창은 아니다.

 

  줄리아의 챕터는 다소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낭만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아버지에 대한 신뢰 사랑 등으로 가업을 잇는다. 그러던 중, 그녀의 아버지, 피에트로 란프레디가 쓰러지고 가업이 위기에 처하고,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위기를 맞이한다. 이 부분은 생각처럼 몰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스미타의 경우 최하의 계급이라던가 사라의 경우 최악의 질병이라는 위기는 남녀를 불문하고 공감할 수 있는 상황 설정이라면, 줄리아는 뭐 집안 망하면 뭐 다른 일을 알아보던가 방법이야 뭐 있지 않겠는가. 물론 사라의 전문직인 커리어나 지위는 완전히 공감하긴 힘든, 제 지위가 있지만 뭐 질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큰 위기 말이다. 줄리아의 경우 위기의 발생까지는 따라갔지만, 그 위기를 전환하는 소설적 전개가 조금은 로맨틱하게 넘어간다는 느낌이어서, 살짝 아쉬운 부분이다.

 

  사라의 경우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로펌의 경력직 변호사라는 직업을 가졌다는 설정이다. 여성이 유리천장을 뚫고 두 번의 이혼, 그리고 세 자녀를 갖고 커리어를 우직하게 이어나가는 그녀는 그녀의 말처럼 마치 인생을 전쟁처럼 여성이라는 약점을 커리어라는 단단한 갑옷으로 무장하고 남자들을 무찔러 나가는 멋진 여성으로 그려진다. 여성이라는 점을 배제하고 누군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지위가 낮으나, 자신의 노력으로 신분상승하는 스토리는 사실 매력적이다. 그래서 스미타보다는 아니지만 줄리아보다는 몰입이 가능하다.

 

  그러던 그녀의 삶이 유방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발병률 높은 유방암 유전자를 가진 그녀의 몸이 결국 귤만 한 종양 덩어리의 암이 몸에서 발견되는 순간부터 그녀의 삶이 무너져가는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나가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우면서 한편으로는 공감이 된다. 큰 병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개인적인 경험으로 인해서 원치 않은 실패를 경험할 때 유사한 경험을 했기에 그녀의 묘사가 절절하게 다가왔다. 저와 같은 노동자들은 육체적인 상해만 입어도 직장을 잃는 경험을 주변에서 많이 보았고 실제 암 때문에 그만두는 경우도 봤기에 소설과 현실 사이의 괴리가 적었습니다.

 

인상 깊게 봤던 구절

 

  여섯 살, 그가 지금 랄리타의 나이일 때 어머니는 당신의 일터에 처음으로 딸을 데려갔다. "잘 바둬, 이게 나중에 네가 할 일이야." 

 

  정치인들이 모르는 건 아니다. 개혁보다도, 사회적 평등보다도, 심지어 일자리보다도 더 시급한 것이 바로 화장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은 인간답게 배설할 권리다. 16 페이지

 

  '내 딸은 글을 배우게 될 거야.' 이런 생각을 하자 기쁨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여자는 결혼하는 순간부터 빚에 쫓기는 신세나 마찬가지야."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경우란 없어요." 의사는 존슨&록우드의 지분 변호사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 사라 코헨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지 못하리라 

 

  매 맞고 모욕당한 딸의 작은 몸을 으스러져라 끌어안은 채, 아내는 다시금 예전의 한 여자아이로 되돌아가서 울고 있었다. 희망이 꺾인 채, 그토록 간절히 꿈꾸어온 삶을 딸에게 줄 수 없어서 울고 있었다. 

 

  불가촉천민 여자들은 시선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해야 할 대상이라고 멸시하면서도 그런 여자들을 강간 하는 데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인도에서 매년 살해당하는 여자의 숫자가 200만 명이라고 했다. 

 

  "고귀하게 태어나야만 용기를 지닐 수 있는 건 아냐" 

 

  병자는 임부보다 더 나빴다. 임신은 어쨌거나 그 상황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있다. 암은 다르다. 암은 변칙적이고 재발 가능하다. 

 

  병과 함께 진행되는 따돌림이었다. 소속되어있던 곳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배제되는 증상. 

 

  유리천장을 멋지게 깨버렸던 사라가 이번엔 건강한 자들의 세계에서 병자, 약자, 사회적 취약층

을 향해 세운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혔다. 

 

  사라는 스스로의 고지식함에 또 한 번 놀랐다. 그는 자신의 병 때문에 로펌이 타격을 입을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지금 맞닥뜨린 것은 자기가 없어도 로펌은 아주 잘 돌아간다는 잔인한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