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다. 지나가다 가슴이 따뜻한 책(?)이란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보았다. 예전에 꾸역꾸역 읽어나갔던 한 책이 떠올랐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가슴이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만들어 주었던 책이라서 적어보고자 한다.
2013년에 열린책들에서 야심 차게 오픈 파트너를 런칭했었다, 소설도 잘 안 읽으면서 왠지 이건 사야만 해, 라는 마음에 질렀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 같다. 오픈파트너는 망했지만(?), 다행히 리디북스로 책을 옮겼다. 나만의 사이버 서재에 보관 중이다.
다시 이방인으로 돌아간다. 이방인에 집착아닌 집착을 하는 이유가 있다. 예전의 지적 허세와 연관이 있는데, 실존주의 문학이 내 마음에 자리 잡았었던 것과 연관이 있다. 사실 카뮈는 자신은 실존주의자 아니라 말한 바 있다. 사실 사르트르 이외에는 실존주의자라고 말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부조리 문학이라고 전환해서 보면, 넓은 의미로 많은 책들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그래서 <이방인>의 부조리한 세계관이 좋다.
사실 <이방인>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시점도 뫼르소의 묘사나 서술을 따라가기에 읽기 편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여러 번 읽어도 읽었다고 말하지 못하곤 했다.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너무 겉핥기로 읽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너무 철학적인, 아 이 책은 실존주의 어쩌고, 카뮈의 철학적인 어쩌고 이렇게 보게 되곤 했다. 천천히 책의 구절을 살피며, 가물가물한 감상평을 쥐어짜내본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을까, 모르겠다.”
이 책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문장 아닐까. 사실 카뮈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의 모습, 그 태도로 인해 어쩌면 곤란한 위기에 처하고 결국에는 사형을 맞이한다. 카뮈는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않는 모든 사람은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방인을 통해,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카뮈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일순 나는 그들이 나를 심판하기 위해 거기 있다는 터무니없는 느낌이 들었다.”
카뮈가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알제에서 마랑고에 있는 양로원으로 간다. 가기 전 사장에게 말할 때 태도, 양로원에서 사람들에 대한 말 등을 보면, 카뮈는 과연 어머니를 잃은 사람인가 싶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잘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딱히 교정할 마음이 없다. 그 점이 나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항상 말과 행동에 있어 자기 검열을 하고 들어간다. 비난이나 비판을 염두하는 비겁한 자세라 생각한다. 뫼르소를 보면서 솔직한 인간이란 점에 주목했다. 그렇다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은 아니다. 타인의 말이나 태도에 대해 굉장히 섬세하게 반응한다. 자신에 태도가 어떻게 보일지에 대해 인지하고 있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언제나처럼 또 하루의 일요일이 지나갔고, 엄마는 이제 땅속에 묻혔으며, 나는 다시
일터에 나갈 것이고, 그리고 어쨌든 아무것도 바뀐 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랑고에서 알제로 돌아온 카뮈, 아무렇지도 않게 예전의 직장 동료였던 마리와 만나 데이트하고, 코미디 영화를 본다. 그리고 사랑을 나눈다.
난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뫼르소 이거 사이코패스 아닌가 싶었다.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긴 했다. 책에서는, 군중의 시선에서, 혹은 범죄자가 된 뫼르소에게는 치명적인 알리바이가 되었다. 내가 사이코패스(?)는 아니지만, 내 말이나 행동이 오해를 사는 경우를 겪은 바 있다. 나는 그냥 내가 생각한 대로 한 건데, 곡해되어 전달되는 경우를 수없이 느껴왔다. 전달하는 내가 문제가 있는 것은 맞다. 뫼르소를 이해한다.
“마리는 내게 자기를 사랑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긴 하지만,
아마 아닌 것 같다고 대답했다.”
뫼르소는 레몽을 대할 때나, 마리를 대할 때나, 혹은 살라마노 영감을 대할 때 굉장히 솔직하면서, 독특한 방식으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몽은 다혈질에 강약약강의 인물이다. 아랍계 정부를 폭력적으로 대하지만, 프랑스 경찰 앞에서는 무력한 인물이다. 결국 이 인물과 어울리면서 뫼르소는 아랍인과 충돌하는 사건을 겪는다. 마리는 뫼르소와 사랑을 나누는 사이다. 그런데 사랑하지 않는다 말하고, 결혼을 원하면 하겠다는 표현을 한다. 그런 뫼르소를 마리는 사랑하고, 마지막까지 뫼르소를 찾아간다. 살라마노 영감은 기르는 개와 지지고 볶고 사는 인물이다. 거의 학대 수준으로 개를 다루다가, 개를 잃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 이런 모습에 뫼르소는 어머니를 떠올린다.
이렇게 뫼르소란 인물은 세상에 대해 무감각해 보이지만, 굉장히 섬세한 서술을 하고 있다. 자신의 삶을 추구하지만, 다른 이들과의 끈을 놓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딱히 집착하지도 않는 삶이다. 다만 그게 문제가 될 뿐이다. 문제를 알고 있고, 결과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사람은 결코 삶을 바꿀 수 없다고, 모든 삶이 어쨌든 나름의 가치를 지니는
법이며, 따라서 여기서의 삶도 내게는 전혀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학생이었을 때야 나도 그런 종류의 야심을 상당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학업을
포기해야만 하는 순간이 오자, 나는 그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아무런 중요성도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주 빨리 깨달았던 것이다.”
사장이 뫼르소에게 파리로 갈 수 있는 제안을 거절하면서 남긴 구절이다. 알제에서의 삶, 피에누아르 카뮈가 느끼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한다. 프랑스 영토지만 아랍인들과 엉켜 사는 프랑스인, 본토의 중심지 파리로 가고자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심리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서울과 퍼스, 밴쿠버를 돌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결과적으로 어디에 사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하고 느끼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생각은 다음과 같다. 물리적으로 제한된 상황이 찾아오면, 시야는 굉장히 좁아지기 마련이다. 넓었던 사람도 마찬가지다. 상자 안에서 나오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나는 경련을 일으키며 권총을 쥔 손에 발작적으로 힘을 주었다. 방아쇠가 굴복하고,
나는 권총 손잡이의 매끈한 배를 건드렸다. 그리고 모든 것이 거기서부터, 무미건조 한
동시에 귀를 찢는 듯한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내가 방금 낮의 균형을, 스스로 행복감을 느꼈던 해변의 그 예외적인 고요를 파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꼼짝하지 않는 아랍인의 몸에 대고 또다시 네 발을 더 쏘았다.
총알들은 바깥으로 흔적을 드러내는 대신 몸뚱이 깊숙이 박혀 들었다. 그 네 발의 총성이
내게는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와도 같았다."
구절이 너무 길지만, 굳이 집어넣은 이유가 있다. 그냥 아랍인한테 총을, 그것도 확인사살을 한 사건의 요약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뫼르소란 인물의 삶을 완전히 반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농담하자면, 나는 이 책이 알제 날씨 정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알제가 얼마나 덥고 짜증이 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보게 된다. 그리고 뫼르소가 아랍인을 쏜 이유, ‘햇빛 때문’ 이란 경악스러운 표현이 주목할 부분이다. 뫼르소의 서술에는 계속해서 날씨나 더위, 열기 등이 나타난다. 이 부분도 굉장히 새롭게 다가온 부분이었다.
“설사 생을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옥 안에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1백 년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지닌 추억의 양은 지루함을 재우기에 충분
하리라.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일종의 특권이었다.”
뫼르소는 재판 중 태도나 과거 행적으로 인해 불리해진다. 그러나 선고를 기다리는 와중에도 삶의 태도가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배워야 할 태도가 아닌가 싶었다.
“지금 이 삶을 회상하는 것이 가능할, 바로 그런 삶요”
사형을 맞는 뫼르소를 회개하게 하려는 사제와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거기서 세상 무관심한 태도를 유지하던 뫼르소의 감정이 고조되는 시점이다. 자유를 박탈당하는 삶에 쳐한다고 가정해보자. 감옥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사회적으로 한계에 묶여 있을 때,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경험을 해두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한다.
“내 마음속에 담겨 있는 모든 것을 기쁨과 분노가 뒤섞여 격앙된 상태로 쏟아 냈다. 당신은 그처럼 확신에 찬 표정을 하고 있어, 그렇지? 하지만 당신이 확신하는 것들 중, 여자의 머리카락 단 한 올만큼의 가치라도 갖는 건 아무것도 없어. 심지어 당신에겐 당신 자신이 살아있는 것조차도 확실치 않을 거야. 마치 시체처럼 살고 있으니 말이야. 반면 이 나는, 마치 두 손이 텅텅 빈 사람같아 보이겠지. 하지만 난 나 자신에 대해 확신하고 모든 것에 대해 확신해, 당신보다도 더. 나는 내 삶과 이제 곧 닥칠 죽음에 대해 확신해. 그래, 나한텐 그것밖에 없군.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 진실을 꽉 움켜쥐고 있어. 그 진실이 나를 꽉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지. 나는 이전에도 옳았고 여전히 옳고, 언제나 여전히 옳고, 언제나 옳아. 난 이런식으로 살았어. 아마 다른식으로 살 수도 있었을 테지. 나는 이런걸 했고, 저런 걸 하지 않았어. 이런 일을 하지 않는 대신 다른 일을 했지.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바로 이렇게. 마치 내내 이 순간만, 어쩌면 내 무죄가 입증될 수도 있을 저 이른 새벽만 줄기차게 기다려 왔던 것처럼 되었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고, 그 이유가 뭔지 난 잘 알고 있어. 당신도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을 거야.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부터, 이제껏 내가 살아온 이 터무니없는 생애 전체에 걸쳐, 아직 오지 않았던 세월을 거스르는 어둑한 바람이 내게로 불어와,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 만큼이나 실감 나지 않는 저 무수한 세월과 함께 내게 약속된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쓸려 가며 다같은 것이 되어 버려. 다른 사람들의 죽음, 엄마에 대한 사랑이 다 무슨 소용이야. 당신이 말하는 신, 사람들이 선택하는 저마다의 삶, 그들이 고른 운명이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뭐가 중요할까. 유일한 하나의 운명이 하필 나 자신을 뽑아 들어야 했고, 그럼으로써 나와 더불어 무수히 많은 특권자들 까지도 한꺼번에 자동으로 선택했는데, 그들 또한 당신처럼 자기들이 나의 형제라고들 하지. 이해하겠어? 그러니까 내 말 이해되느냐고. 모든 사람이 다 특권자야. 특권자들만 있어. 다른 사람들 역시 언젠가는 단죄되고 말겠지. 당신도 마찬가지로 단죄될거야. 당신이 살인때문에 기소되었다가 자기 엄마 장례식날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한들, 그게 뭐? 살라마노의 개도 그사람의 마누라만큼 중요해. 자동인형 같은 그 작은 여자도 마송이 결혼한 파리 출신 여자 만큼이나 유죄야. 레몽이 셀레스트와 마찬가지로 내 친구란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한데? 셀레스트는 레몽보다 나은가? 마리가 오늘 새로운 뫼르소에게 입술을 허락하건 말건, 무슨 상관이겠어? 당신 이해하느냐고, 이 사형수를. 그러니까, 내 미래의 깊은 곳으로… 나는 악을 쓰며 이 모든 말을 퍼붓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이 길고 긴 구절을 굳이 옮겨 적었다. 사실 이 책에 처음과 끝 문장, 그리고 사제에게 쏟아내는 이 구절만으로 이 책을 읽었다 쳐도 무방하다 생각한다. 그 동안 뫼르소가 무관심한 태도로 삶을 서술하던 것이, 그가 살아온 삶을 얼마나 세밀하게 기억하고 마음에 자리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뫼르소는 세상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자신의 솔직한 삶의 태도를 유지하는 부조리한 인물이다. 뫼르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면, 세상이 부조리한들 오롯이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마무리되길. 나 자신이 혼자라는 걸 보다 덜 느낄 수 있길.
그렇게 되기 위해 나의 처형일에 수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기를
희망하는 것만이 이제 내게 남은 일이었다.”
마지막에 비로소 내가 이책을 통해 진정으로 뜨거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사실 상 뫼르소가 죽어야지 더욱 강렬해질 수 있는 소설이다. 사형 집행하던 구경꾼인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갑자기 자신이 그 사형수가 되었다는 사실에 한기를 느끼며 떨던 뫼르소, 그가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사형집행인의 발걸음을 기다리며, 사형을 맞이하는 자세가 부조한 인간 그 자체다.
카뮈의 죽기 전 인터뷰 중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 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직접 경험과 간접경험이 있다. 직접 경험이 좀 더 강렬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통해 직접 경험을 하고자 한다. 다만 직접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간접경험을 통해 직접 경험이 가진 한계를 넓혀준다고 본다. 좋은 책이 그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데, 나에게 있어 이방인이란 책은 책이 주는 간접경험의 폭을 넓혀주는 책이었다. 뫼르소란 인물의 삶을 내 삶에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마무리해본다.
'책 그리고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David D. Burns 누구나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0) | 2024.03.10 |
---|---|
참을 수 없는 사비나의 가벼움, 그리고 똥 (0) | 2022.01.25 |
22/1/16 두 도시 이야기 찰스 디킨스 (0) | 2022.01.16 |
22/01/15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 미디어의 폭력 (0) | 2022.01.15 |
22/01/10,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글쓰기 (1) | 2022.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