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비문학만을 편식했다. 소설은 왠지 읽기 어려웠다. 등장인물이 많았지만 약간 난독증이 아닌가 싶게 다 잊어버리곤 했고, 내용을 따라가다가 디테일을 노치곤 했다. 1인칭 시점의 소설이 아니면 잘 읽지 않곤 했는데, 최근에 함께 읽기 시작하면서 소설을 소화하기 위해 분투한다. 유시민의 <청춘의 독서>를 통해 이 책을 알게 되었고, 마침 읽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역시 밀리의 서재와 리디북스에서 찾던 중 리디에 있어 구매하고 책을 읽어 나갔다.
1. 책에 대한 소감
"대체 누가 이걸 읽겠어요? 내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차이퉁>을 읽거든요!"
한편 우리가 소설 속 대중, <차이퉁>의 주요 독자가 된다면 어떨까. 대중은 미디어를 통해 사건을 접한다. 미디어를 통해 대중은 왜곡된 사실을 진실로 믿기 마련이다. 미디어가 가진 한계이면서, 그 속성을 잘 이용한 그들의 폭력성이 아닐까 한다. 상황을 좀 더 자극적으로 보도하고, 폭력을 선동하면, 대중들은 휩쓸린다. 거짓말을 진실로 포장하는 과정, 그것이 저급한 저널리즘이 갖는 속성이라 본다.
카타리나는 힘든 상황에서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기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삶에서 "치근덕거리는" 남성들을 물리고, 우연히 만난 사내가 범죄자였다. 그 결과, 그녀는 미디어에 의해 테러리스트의 창녀로 전락한다. 카타리나를 도왔던 주변인들, 블로르나 부인이나 후베르트는 빨갱이 투르데 혹은 빨갱이의 남편이라는 모욕을 당하고 곤욕을 치른다. 그녀의 어머니, 전남편, 신부, 교사 등의 진술로 그녀의 삶은 만싱창이가 된다. 독자는 진실을 볼 수 있으나, <차이퉁>을 보는 독자는 카타리나를 모른다.
학력이나 지위 수준을 떠나서, 아니 저널리즘은 독자의 학력과 지위에 맞춰서 보도를 계획하고 발행한다. 독자는 편향된 정보와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저널리즘이 제시하는 "진실"을 믿는다. 무엇인 진실이고, 저널리즘이 제시하는 정보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를 알게 될까, 오늘날의 문제의식과 멀지 않은 책이다.
“전화에는 아예 손대지 마십시오. 내일 신문도 펼치지 마시고요.”
뫼딩은 자신과 동료가 처할 위험을 감수하고 카타리나에게 위와 같은 조언을 한다. 1974년 2월 21일 목요일, 히페르츠는 휴가지에서 <차이퉁> 기자를 통해 카타리나 사건을 접하고 즉시 돌아가기로 마음먹는다.
“당신도 거기에 나왔죠. 난 당신을 금방 알아보았어요. 당신은 분명히 그 변호사이자 이 창녀의 고용주 잖아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다정함'이다.”
블룸의 주변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차이퉁>으로 접한 카타리나에 대해 폭력을 가한다. 불특정 다수의 전화, 우편, 그리고 인팀 페어잔트하우스의 카탈로그(성인용품) 목록과 함께 위와 같은 문구. 단순히 무지한 대중이 아니라, 지위, 직업을 떠나 모든 보수주의자, 좌파나 공산주의자의 창녀로 묘사한 보도가 진실로 받아들인 대중들의 집중포화를 맞는다.
“그자랑 너랑 붙어먹었지?”
바이츠메네의 질문에 카타리나는 성적인 면에서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결벽에 가까운 태도의 진술을 했다. 바이츠메네는 이미 카타리나를 범죄자로 대우했다. 한편 뫼딩이란 인물은 카타리나에 대해 호의적으로 대하기도 했고, 플레쳐라는 여경은 뭐 그렇게 호의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립적인 느낌이었다. 물론 수사를 지휘하는 바이츠메네의 행동이 주요 심문자였으니, 아무래도 불편한 느낌이 들긴 했다.
수사기관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서 심문을 진행해야 하지만, 대체로는 '유죄'로 일단 사건을 설정하고, 수사를 통해 범죄행위를 밝히는 행위를 하고 있다. 1974년의 이야기 만의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2022년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본다.
“<존탁스차이퉁> 기사의 결과를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그것이 교양을 갖추고 성공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분노케 하고 얼마나 거친 방식의 폭력까지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알리기 위해서다.”
<차이퉁>이 대중을 선동했다면, <존탁스차이퉁>은 블로르나 부부와 같은 지식인까지 화염병을 상상하게끔 폭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다. 독자의 시선에서 보기 때문에, 진실을 보여주는 소설적 장치가 카타리나의 삶, 명예가 순식간에 박살 나는 과정이 몰입을 도왔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게 기이하게 느껴졌다.”
카타리나의 울음은 그녀가 진정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음이 보였던 구절이었다. 내가 만약에 카타리나 혹은 주변인이 된다면, 나도 누군가의 면상을 갈기던가, 정말 극단의 선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폭력이 폭력을 낳는다는 느낌이다.
"저널리즘의 실제 묘사 중에 <빌트> 지와의 유사점이 있다고 해고 그것은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다."
이 책의 서두에 달려있는 이 문장을 통해, 하인리히가 당시 독일의 언론의 폭력성을, 빌트지를 꼬집는 방식으로 이 소설을 썼다. 하인리히 뵐이 패전 독일이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권력이나 언론이 소외된 약자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테러리즘이나 반공주의에 대한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에 대해 폭로하고 고발하는 과정이 소설로 만들어졌다. 해설 봤다.
"사람이 살만한 나라에서 살 만한 언어 찾기와 다름 아니다"
작품 해설에서 마음에 남았던 문구다. 살만한 나라라면, 사람들이 살만한 그 국격에 걸맞은 언어를 갖춰나가는 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바가 아닐까. 한국은 살만한 나라인 것은 맞으나, 살 만한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은 어떠한가. 예전에는 어떻게 보면 진영을 나눠서 각자 정론지라고 주장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인터넷 뉴스, 종합편성 채널 등 다양해진 언론 진영이 서로 자신들의 진영을 옳다는 방향으로 주장하고, 격해졌다.
오늘날의 이르러서는 이른바 '가짜 뉴스'라는 문제가 발생한다. 진영을 떠나 서로 극단의 논리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하는 거의 선동에 가까운 내용을 보도한다. 보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민망할 정도의 수준이지만, 문제는 이를 소비하는 대중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보수진영이나 진보진영을 떠나, 진영논리에 맞춰서 극단으로 나아가는 것이 상대방을 이해하지 않는, 아예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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