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시집, 1부 옛날의 그 집 <산다는 것>

p5kk1492 2024. 9. 25.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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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박경리

 

산다는 것

 

체하면

바늘로 손톱 밑 찔러서

피 내고

감기 들면

바쁜 듯이 뜰 안을 왔다

갔다

상처 나면

소독하고 밴드 하나 붙이

 

정말 병원에는 가기 싫었

약도 죽어라고 안 먹었다

인명재천

나를 달래는 데

그보다 생광스런 말이 또

있었을까

 

팔십이 가까워지고 어느

날부터

아침부터 나는

혈압약을 꼬박꼬박 먹게

되었다

어쩐지 민망하고 부끄러

웠다

 

허리를 다쳐서 입원했을

발견이 된 고혈압인데

모르고 지냈으면

그럭저럭 세월이 갔을까

 

눈도 한쪽은 백내장이라

수술했고

다른 한쪽은

치유가 안 된다는 황반

뭐라는 병

초점이 맞지 않아서

곧잘 비틀거린다

하지만 억울할 것 하나도

없다

남보다 더 살았으니 당연

하지

 

속박과 가난의 세월

그렇게도 많은 눈물 흘렸

건만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

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지나고 보니 박경리 작가에 작품을 제대로 읽은 것이 하나도 없다. 그분의 명성만 알고 아는체 했을 뿐인데, 이번 시집의 첫 작품을 접하면서 나름의 삶의 회한을 시로 느낀다.

 

나는 내 인생의 파도가 있는 놈이라 말하고 다닌다. 저자의 인생에 비하면 얼마나 편하고 게으름으로 점철된 삶일까. 산다는 게 쉽지 않다고 입에 달고 사는 놈팽이가, 시를 쓴 분의 삶에 대하 회한의 깊이가 바닷 속 심연보다 깊어 부끄러워 어딘가 숨고 싶다.

 

나도 언젠가 인생의 황혼기에 누군가에게 이런 생동감있는 발자취를 남긴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다. 지금에 내가 글과 말을 흔적으로 남기는 것도 나름의 발버둥이다. 산다는 것이 참 야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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