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은 결국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다. 나는 장애인이 아니지만, 그들의 권리를 지지한다. 사실 후천적인 원인으로 장애판정을 받는 많은 이들이 존재한다. 결국 우리도 그들의 상황에 처할 수 있다.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 우리가 처하는 삶의 변수를 염두해 두는 부분도 있다.
우리가 해외소식에 대해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도 결국 우리 국내 상황의 변수에도 적용될 가능성도 고려하는 부분이다. 우리와 관계가 멀어보이는 세상에 대한 관심이 결국 가까운 곳에서 벌어질 수 있음을 대비하기 위함이다. 남의 나라 사정까지 걱정해주는게 괜한 짓이 아니다. 우리도 정말 쿠데타가 일어날지 모른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지 않았는가. 우크라이나 혹은 가자지구에서 겪는 전쟁이 한반도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나와 이해관계가 대치되는 이들의 권리에 대해서도 수긍할만한 내용은 지켜주고 지지할 의사가 있다. 그들이 존중받은 만큼 우리에게 대화와 타협의 손을 내밀 가능성이 높아진다. 극한으로 서로 대립하게 되면 서로 공멸할 뿐이다. 서로가 휘두르는 주먹 대신 악수할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물론 작금의 상황에는 적용하긴 어렵지만.
나는 종교인이 되기 전에 리차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팬이었다. 나는 인간을 유전자적 정보에 따른 생물학적 기계란 표현이 좋다. 그리고 사회생물학의 저자 에드워드 윌슨을 비롯한 학자들은 인간의 이타심에는 결국 자신의 생존, 즉 이기심의 치환이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의 주변에 대한 이타성의 발현은 결국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진다. 우리는 살기위해 남을 돕는다. 그것이 나쁜것일까.
나는 그저 이타심을 가치중립적으로 설명하는 레토릭을 선호한다. 이타적 행위를 숭고하게, 영웅적으로 표현하면 사람들은 남을 돕는 행위에 부담을 느낄 수 있다. 도리어 이기적인 행동이 솔직한 것, 이타적 행동은 위선적인 것이란 표현으로 자신이 이타적 행동을 하지 못하는 부분을 정당화 한다. 나는 그럴필요 없다고 본다. 이타성도 결국 이기성의 뒷면일 뿐이다.
남을 돕자, 그냥 내가 좋아서 혹은 내 욕심으로 도울 뿐이다. 우리가 하는 행동 중에 남을 돕게 되는 일이 생긴다. 내 이기심의 발현이 이타적 행위로 치환된다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럭키비키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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