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1부 옛날의 그 집 <천성>

p5kk1492 2024. 9. 30. 0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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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 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

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

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

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

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

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

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

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

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

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

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ㄴ 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을 골랐던걸 지금 약간 후회하는 점 하나는 시들이 너무 길다. 낭독할 수 있는 수준의 길이가 아니라서 이것을 유튜브로는 업로드할 수 없다는게 아쉽다. 낭독을 하고나면 한 오분가까이 채울거같다. 싫은 일은 하지 않는 천성을 지닌 저자가 글쓰기의 세계에서 자신의 천성을 유지하며 잘 지냈다. 공적인 영역에서 싫은소리를 했던 점은 개인적인 천성에 반하면서도 해야만 했다는 마음이 담겨있는 끝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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