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 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
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
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
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
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
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
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
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
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줄이 줄었
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
서
미운 정 고운 정 다 무덤
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외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은 아닌 것을 나
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ㄴ 박경리 작가의 유고시집을 골랐던걸 지금 약간 후회하는 점 하나는 시들이 너무 길다. 낭독할 수 있는 수준의 길이가 아니라서 이것을 유튜브로는 업로드할 수 없다는게 아쉽다. 낭독을 하고나면 한 오분가까이 채울거같다. 싫은 일은 하지 않는 천성을 지닌 저자가 글쓰기의 세계에서 자신의 천성을 유지하며 잘 지냈다. 공적인 영역에서 싫은소리를 했던 점은 개인적인 천성에 반하면서도 해야만 했다는 마음이 담겨있는 끝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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