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the Draftsman

The first draft of anything is shit...but I still have written that shit.

일상 끄적이기

방구석 철학자, 밤 그리고 고독의 역설

p5kk1492 2025. 1. 14.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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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내가 처음 유튜브를 만들었을 때, 방구석 철학자라고 채널을 만들었다. 하지만 철학을 말하기엔 너무나 부족했고, 지금의 방구석 라디오로 자리잡았다. 라디오 컨셉 안에서 가끔 철학을 말하는게 내 부족한 지적 허영을 채우는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런데 요즘 챗지피티와 철학얘기를 주고 받으면서 방구석 철학자란 캐릭터에 대해 다시 부활시키고 싶기도 하다. 그래서 한번 챗지피티의 힘을 빌려 방구석 철학자 컨셉으로 글도 써보고, 라디오도 만들어 보려고 한다. 아래는 챗지피티에게 질의해서 철학적 글감을 얻어왔다.

 

혼자인 시간을 사랑하면서도, 왜 사람들은 연결을 그리워할까?

 

고독을 사랑하더라도, 인간의 실존은 관계맺음에 있다. 아무리 신앙심이 깊어도 신과의 대화를 하는 인간, 그러한 인간도 또다른 신에게 말을 거는 타자와 관계 맺기를 바란다. 우린 형이상적 관념을 추구하면서도, 살결을 맞대는 인연과의 스킨쉽에서 옥시토신을 폭발시킨다. 역설같지만 어찌보면, 작용과 반작용이라고 해야할까? 고독으로부터의 도피라고 패러디적 표현을 해본다.

 

나도 고독을 사랑하는 인간이다. 혼자만의 시간에서 에너지를 얻고, 영감을 얻는다. 하지만 나도 사람을 고파하는 관계형 인간이다. 인간적으로 깊게 연결되고 싶고, 살아있는 자연인의 대화를 즐긴다. 다만, 에너지를 얻기보다는 쓰는 편이다. 관계맺음 속에서 나의 실존, 존재물음을 해소하긴 한다. 하지만 거기서 쓴 에너지를 다시 회복하려면 나는 고독에 천착해야 한다. 고독속에서 나는 살아나고, 관계맺음에서 피어나고 시든다. 다시 동굴로 들어가는, 방구석 철학자다.


고독은 자유의 상징일까, 아니면 인간의 한계일까?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비명은 그의 고향인 그리스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 있는 묘비에 새겨져 있습니다.

 

원문은 그리스어로 다음과 같습니다:

"Δεν ελπίζω τίποτε. Δεν φοβούμαι τίποτε. Είμαι λεύτερος."

영어로 번역하면:
"I hope for nothing. I fear nothing. I am free."

한국어로는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

 

그리스인 조르바란 책을 통해 알게된, 니코스 카찬차키스의 묘비명은 워낙 유명하다. 그가 논하는 자유가 아마 고독을 선택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그의 책 안에서 조르바란 인물의 삶은 고독의 역설과 어울리는 인물이다. 그는 방탕해 보이기도 하고, 거침없는 무뢰한 느낌도 들지만, 그만의 거친 철학이 담겨 있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자유의 가치가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않기에, 그래서 두렵지 않고, 결과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고독도 결국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때 누릴 수 있는 상황이다. 고독과 외로움의 차이는 아무래도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이 있다. 내가 외로움의 정서에 매몰되서 가끔씩 찾아오는 관계에 집착할 것인가. 아니면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고독을 택할 것인가. 후자를 선택하면 자유로 가는 한걸음을 내딛는 셈이다. 두렵지 아니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허나 인간의 한계란 점도 고독이 벗겨낼 수 없는 한계성과 일치점이 있다. 스스로 택한 고독일지라도, 외로움의 정서를 이겨낼 수 없다. 고독이 외로움에 패배하면, 자유를 집어 던지고 우리는 결국 외로움을 해소하려는 일종의 자유를 버린 삶을 살게 된다. 나이가 들어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냄새에 집착하고, 남자들의 노욕은 추태를 불러온다. 이러한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두렵다.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유를 포기하더라도 외로움을 해소하고픈 집착이 삶을 지배한다.

 

인간은 결국 외로움의 정서가 고독이란 자유상태를 역전시키는 한계를 갖고 산다. 나는 고독이 주는 외로움을 견디는게 좋다고 본다. 관계맺음이 과해지면 괴롭다. 나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주변도 괴롭다. 늙은 아재의 노욕이 불러올 추태는 고독을 견디는 오롯한 수컷이 되야 한다. 그것이 방구석 철학자가 추구하는 개똥철학이다.

 

후기

 

처음 시도해보는 것인데, 나름 나쁘지 않았다. 소재를 내가 생각하기는 어려워서 앞으로도 챗지피티의 힘을 빌리고, 종종 철학적인 대화를 하는 녀석의 도움을 받아 부캐 방구석 철학자를 부활시켜보고자 한다. 부활이 취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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