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참을 수 없는 사비나의 가벼움, 그리고 똥

p5kk1492 2022. 1. 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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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최대한 방문자 수 를 늘려보려고 항상 타이틀을 고정했다. 에라 모르겠다. 이번 글의 주제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의 책이다. 서평 아니고 잡담이다. 워낙 유명하고, 서평이나 유튜브도 많다. 내 수준에서 이 책은 오독할 수밖에 없다. 나만의 시선으로 이 책을 편집해서 올린다. 그렇다고 너무 왜곡된 내용을 올릴 수는 없고, 내가 이 책에서 깊게 빠져든 부분만 딱 언급하고 마무리한다. 

 

내가 이 책을 급히 읽었던 이유는, 사실 '프라하의 봄'이라는 역사적 배경 때문이다. 저자가 프라하의 봄을 바라보는 서방세계에 대한 시선을 소설로 비틀었다고 해야 하나. 그런 어렴풋한 기억에 이 책을 다시 보았다. 마침 야코프 스탈린이 자살한 이야기가 반갑게(?) 다가왔다(그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다. 죽은 자에게 Rest in peace). 처음 이 책을 접했을 때, 이게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서, 그 뒤로 똥과 신학적 문제에 설명에 혼란을 느껴서, 책을 덮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과 같이 읽을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야, 이 책을 읽었다. 이미 기억이 안나는 책이었기에, 백지상태로 책을 다시 봤고, 일단 이해한 내용만을 토대로 감상을 남긴다. 전지적 사비나 시점, 똥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골자다. 거기에 욕심부려서 키치에 대해서도 한번 써보고자 한다.

 

한번은 아무것도 아님

 

“산다는 것에는 무게가 없다. 잔혹함, 아름다움,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

 

Einmal ist keinmal

 

산다는 것은, 만약은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은 리허설 없는 연극 무대, 그렇기에 역사는 반복될지언정 우리의 삶은 딱 한 번이다. 따라서 선택하지 않았던 삶에 대해서 후회할 필요도 없다. "만약에 혹은 어쩌면"이라고 해봐야 의미 없다. 자신의 선택에 대해 흔들릴 뿐이다.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다음으로 나아간다. 그걸로 끝이라 본다. 

 

"자신이 사는 곳을 떠나고자 하는 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이다."

 

사실 이 구절에서 뜨끔했다. 내가 서울에서 퍼스로, 퍼스에서 밴쿠버로 갔던 이유를 들킨 기분이다. 지금 제주에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사비나를 떠올렸다. 그녀는 항상 떠났다. 프라하에서 제네바, 그리고 취리히에서 파리 그리고 미국까지 말이다. 그녀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인 걸까? 나는 사비나를 동경하며 읽었다. 그녀의 확고한 생각 때문이다.

 

사실 사비나의 이야기를 할 때, 프란츠와의 관계를 언급해야 한다. 나는 이 부분은 의도적으로 삭제한다. 그녀의 존재의 가벼움은 어쩌면 그녀만의 에로틱한 가치관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나는 그녀의 가벼움은 키치를 거부하는 데에서 온다고 본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를 동경한다. 나도 뭐 또 다른 프란츠인 건가. 하지만 난 프란츠처럼 엘리트도 아니고, 힘이 넘치지도 않는다. 부인도 없다고. 여자 친구도 없어.

 

사비나의 가벼움은 배신의 욕망이다. 사랑에 대한 배신도 있으나, 자신이 속한 공산주의 혹은 공산주의 진영에서 빠져나온 정의로운 여성이라는 키치에 대한 배신이라고 본다. 

 

사비나 이야기를 잠신 중단하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똥'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똥을 신학적 문제로 풀어가는 저자의 해설이 굉장히 흥미롭게 읽혔다. 다만, 어렵다. 농담과 철학적 견해를 엮어서 풀어내는, 저자가 대단하면서도 원망스럽다. 

 

신의 존재는 절대적이다. 절대선인 신에게 있어 '똥'의 존재는 절대적 신의 세계관에도 추함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다. 하지만 그걸로는 인간의 추악함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똥'이라는 절대적인 추함은 신에게 책임이 있다. 이것이 저자가 설명하는, 세상이 똥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으로 보인다. 독특한 해석이라서 상당히 말하기 곤란하다.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저자는 소설 안에서 키치라는 표현을 사비나의 입으로 나오게끔 했다. 계속 키치로 추정되는 구절들이 보이나, 구체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아서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구체적으로 키치를 설명하는 부분만 서술한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란 구절을 통해, 저자는 키치를 정의한다.

 

똥이란 추한 것을 부정해야만 하는 세계관

 

사비나가 부정한 것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산주의를 확고부동한 절대성으로 설정한 세계관, 공산주의 키치를 부정했다고 본다. 순간 구글로 커닝하려다가, 접어두고 책의 내용만을 가지고 작성하고 있다. 힘들다. 이후의 공산주의 키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사비나, 미국에서 상원의원에 태도에서 다시 키치를 마주한다. 

 

"상원의원이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한 논거는 하나밖에 없다. 그의 감수성. 가슴이 말할 때 이성이 반박의 목청을 높이는 것은 예의에 벗어난 짓이다. 키치의 왕국에서는 가슴이 독재를 행사한다."

 

키치는 결국 인간의 가슴을 울리는 보편성을 자극한다. 아름다움이라는 절대적 선을 제시하면서 추함을 완전히 외면하는 자세, 그것이 저자가 제시하는 키치의 정의다. 쓰면서도 잘 모르겠다. 한편, 키치에 대해서 비판적인 태도로 보일 수 있으나, 우리의 유대감은 키치 위에 근거한다는 점도 제시하고 있다. 이래서 철학적 소설이 위험하다. 이래도 키치, 저래도 키치, 그래서 어쩌라고? 그건 읽은 사람이 짊어져야 할 참을 수 없는 키치의 무거움이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

 

"키치는 거짓말로 인식되는 순간, 비-키치의 맥락에 자리 잡는다. 권위를 상실한 키치는 모든 인간의 약점처럼 감동적인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아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사비나가 뉴욕에서 노부부의 삶에서 감동을 느낀다. 그렇다고 그녀가 노부부의 삶, 그 키치에 감동하지 않는다. 그녀의 삶은 키치를 배신하는 삶이니까. 따라서 그녀는 감동을 느끼지만, 삶은 다시 가벼움으로 나아간다. 비록 그녀가 체코인의 삶을 버리고 미국인으로 살지언정 말이다. 결말이 모호해서, 더욱 좋다. 마치 키치를 배신한 그녀의 삶이 어떻게 끝날지 모르게 말이다. 죽기야 죽겠지, 그녀는 Übermensch는 아니니까 말이다.

 

위버멘쉬 하면 니체

 

사실 이 책이 사랑받은 이유는, 저자의 철학적인 이야기보다 인물들의 사랑이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저자가 제시하는 Ein ist keinmal 이란 부분, 우리의 인생은 한번, 그리고 무의미하다는 점이 아닐까. 무거움으로 살아도 가벼움을 바라보게 되고, 가벼움을 동경해도 결국 무거움으로 돌아가는 삶이다. 어쩌면 무거움과 가벼움이 혼재되어 있는 삶일 수 도 있다. 결국 죽는다. 죽기 때문에 선택해야 한다. 따라서 "Es muss sein"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Es Könnte auch anders sein.’는 별 의미가 없다. 후회한들 달리지는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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