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함은 보통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자기 주도하에 말하고 원하는 반응이나 분위기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관계 맺음의 과정에서 말하기란 나같이 내성적인 사람에게도 활력이 된다. 나름 말을 잘하는 재주도 있었다. 그 능력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17년도 이후 오랜 시간 실어증까진 아니어도 오랜시간 말하는 방법은 잊어버린 경험을 가졌다. 내가 원하는 의사표현이 제대로 안되서 그냥 고개 숙인채 욕을 한바가지 듣는데도, 친한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수다를 떠드는 상황에서도 나는 말을 못했다. 아니 못했다기 보다 하고싶은 말이 없었던 상태였음이 정확하다. 욱하는 성격과 광대스러운 태도에서 나오던 말주변을 상실했을때, 그냥 2013년 그날 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말주변이 없어진 기간동안 많이 듣는 재주가 생겼다. 어느날 나의 동료였던 분이 'xx이는 말을 많이하는 친구를 만나야되'라고 하길래, 속으로 그래 내가 아가리를 닫으니 얼마나 불쌍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덧붙여서 내가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표현을 해주었던가 아니면 내 왜곡인가 그런 기억이 남아있다. 말 잘 하는 재주 대신 남의 말을 경청하는 법을 터득한게 있었던 시간이었던 셈이다.
지금도 예전처럼 남과의 티키타카가 원만하지는 않지만 적당히 되고 있다. 내성적인 사람의 말주변 정도니까 남이 주도하면 리액션이나 한두마디 정도 하는 수준이라고 보면된다. 이정도도 괜찮다. 내가 표현하고 느낌을 반응할 정도의 수준으로 회복했으니, 뛰진 못해도 걸을 수 있는 수준이 된 기적이라 해두자. 대신에 예전처럼 때론 주도하고 반응이나 분위기를 바꿀정도는 아니어서 예전이 그립긴 하다.
예전의 기억을 그나마 해소시켜주는게 유튜브에 내 혼잣말을 올리는 재미다. 남들과 소통하는 게 말하기의 즐거움이지만, 혼잣말을 10분 내외로 떠들어 재낀다음 올려놓는 것도 참 신선하다. 사실 뭐 조회수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긴 하다. 구독자도 사실상 허수일 정도, 그래도 누군가는 듣고, 댓글이 달리고, 완전히 길거리에서 외치는 걸인의 개소리까진 아니다.
내가 건네는 의미를 담은 메시지가 누군가에게 전달된다는게 좋다. 불꺼진 스튜디오에서 이제 졸거나 취한 관객 한두명, 그리고 주변정리하는 청소 아주머니를 두고 혼자 말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수십 수백을 넘어 수천의 청중 앞에서 스피치 하는 기쁨에는 비할바는 아니지만, 말하는 방법을 잊었던 사람이 불꺼진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들을지 말지도 모를 한두명에게 내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건,
내가 살아갈 이유를 찾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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