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왜 당신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고 있는가, 고윤 저 <소크라테스>

p5kk1492 2024. 9. 5. 19:23
728x90
반응형

소크라테스 <가짜 지식에 절대로 현혹되지 마라>

 

"소크라테스는 골목 구석에서 청소년들을 붙잡고 '디아트리베'를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디아트리베'란, 구석에서 사람들과 모여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고 그에 따른 반론을 서로 주고받으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디아트리베'를 통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고차원적인 '앎'으로 변화시키며 '너 자신을 알라'를 깨우치고 있었다. 깨달음을 위해 사람들과 구석에서 모여 수다를 떠는 소크라테스의 모습, 그건 수많은 대화를 통해 지식을 깨달음으로 승화시키려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스스로 답을 깨닫게 만드는 산파술의 화법으로 유명하다. 우리는 사실 진정한 앎을 대화를 통해 얻곤 한다. 대화의 기본 조건을 동일한 주제에 대해 어느정도 객관적 지식이나 정보가 있어야 한다. 과거에는 어떤 주제나 지식이 지금처럼 넘쳐나지 않았다. 사실 책의 시대에서 미디어의 시대, 미디어가 단순히 신문정도에서 티비, 인터넷, 그리고 유튜브까지 넘어오면서 지식의 양이나 카테고리나 방대해졌다. 문제는 글쓴이가 지적하듯이 일방적으로 정보를 주입당하는 형태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공중파정도만 나오던 시절만 해도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누던 시절이 존재 했다. 물론 책을 통해 대화를 나누는 정도의 깊이는 아니지만, 같은 관심사 혹은 지식 공유하며 서로의 앎과 생각을 나누는 대화가 가능했다. 오늘날은 조금만 관심사가 달라도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따라 서로다른 내용으로 대화가 어려울 정도까지 가고 있다. 사실 디아트리베가 불가능할 정도로 각자의 관심사나 지식의 카테고리가 다르다.

 

어쩌면 요즘 세상에는 알고리즘에 통달한 다양한 분야의 소크라테스가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러한 소크라테스들이 각자 산파술로 대화를 유도해도, 주입된 지식에 만족하는 대중들이 스스로 생각하는 노력을 할지는 물음표다. 다만 앎의 진정한 재미를 깨닫는 다면, 디아트리베가 부활할지 모르겠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