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1부 옛날의 그 집 <인생>

p5kk1492 2024. 10. 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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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인생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등교하려고 집을 나서면

가끔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얼굴은 조막만 했고

입을 굳게 다문 노파였는

가랑잎같이 가벼워 보였

으며

체구는 아주 작았다

언덕 위 어딘가에 오두막

이 있어

그곳에서 혼자 기거한다

는 것이었다

지팡이를 짚으며 그는 지

나간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밥을

빌어먹기 위해

노파는 이 길을 지나간다

는 것이다

 

작량을 잘했으면 저 꼴이

되었을까

젊었을 적에는 쇠고기 씹

어 뱉고

술로 세수하더니만

노파 뒤통수를 향해

그런 말을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젊었을 적엔 노류장화였

던 걸까

명기쯤으로 행세했던 걸

노파는 누가 뭐라 해도

굳게 다문 입을 열지 않

았다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내려가던 뒷모습

몰보라는 이름의 노파

 

ㄴ 나이가 들고, 어떠한 사연도 입을 다문채 살아가면 주변에서는 이야기를 만든다. 대체로 그 이야기는 좋지 않기 마련이다. 나는 17년도에 망가진 상태로 5년간 한 직장에서 병신같은 상태로 일을 했었다. 그때 나는 머리가 다쳐서 망가진 병신이란 소문이 돌았다. 사람들은 앞에서도 같이 일하기 싫은 조롱을 장난식으로 했다. 그리고 상사와 보호자가 같이 상스러운 말투와 욕설에 가까운, 나에 대한 비난을 고래고래 떠들면서 지껄이기도 했었다. 

 

나는 그냥 다 듣고 가만히 있었다. 심지어 화를 내지도 않고 그렇게 4년 7개월을 다니다가 관두기로 했다. 그때가 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그동안 병신처럼 다녔으니, 이제 그만 다닐만 하다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굳이 비판한 부분을 화낼 필요도 없고, 내가 왜 병신처럼 행동했는지 사연을 말할 의미도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마 노파도 설명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사람들은 자신들의 세계관에서 노파를 가지고 놀 뿐이니까. 나도 장난감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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