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짧지만, 길었던 해외생활 16

이주민 봉사일지 24년 12월 8일, 여전히 무난하고 어수선한 봉사의날

이제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봉사의 날, 일주일에 한 번이고 특별한 이슈가 없는 주간 루틴이 되어간다. 오전에는 검정고시 교육보조를 하고, 오후나느 한글교육 봉사를 하는 일정이 고정이기에 특별할 만한 것도 없다. 특별한 일이라면, 아무래도 이주민관련 이야기가 나오다 보니 시리아 내전 관련 이슈가 점심식사 중에 나왔다. 마침 해외관련 기사에 대해 글쓰기를 하지 않은지 오래되어, 오늘 봉사를 마치면 집에 가서 시리아 내전 관련 최근 소식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에도 올릴까 하는 잡생각을 하며 들깨 칼국수 먹방을 했다. 다시 오전시간으로 돌아가자면, 이제 역사파트를 가르치게 되었다. 내 입장에서는 사회파트만 돕는 부분이라 사실상 꿀이었다. 그런데, 역사단원을 알려주는 순간, 내가 생각해도 ..

이주민 교육 봉사 24-12-1 디아스포라가 남얘기일까요

오늘도 평범하디 평범한 교육봉사가 일상인 일요일이었다. 어쩌면 그저 하나의 루틴이 되어가지만, 나름의 이슈들도 있었다. 오전에는 중등 검정고시 사회를 과외하고, 오후에는 펀잡가족의 한글 공부를 돕는 일, 그 뿐이다. 이슈라면 내가 조금 과몰입할 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사실 누군가를 가르칠 때, 긍적적인 피드백이 오면 아무래도 열정이 솟구친다. 작은 불씨가 살아난 기분이랄까 오전에는 사회를 가르치고 있는데, 곧 역사 파트에 돌입할 예정이다. 이 친구도 4월에 시험다보니 진도를 빠르게 나가길 원한다. 또 자신의 요구사항에 부합하게 과제를 잘 수행하고 온다. 한국어를 일상언어로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지만, 일상 어휘가 아닌 교과서의 개념들을 이해하고 문제를 잘 풀어오는건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잘 따라오고,..

네팔음식, 그리고 이주민과의 시간 24/11/27

일요일의 반절 정도를 이주민 봉사로 보내고 있다. 한두시간 정도 하면 되겠지 했던 생각, 어느새 오전에 검정고시 교육보조와 오후에 한글교육 봉사 등으로 이주민들과 시간을 보내는 주일이다. 이주민을 돕던 교육봉사자가 현재 나 혼자로 줄어서 독특한 상황 속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가벼운 마음 반, 조금은 책임감을 가진 하루로 봉사가 끝나고 나면 약간은 정신이 빠져 있다. 그렇게 어영부영 집에와서 정신차려보니 저녁을 먹을 시간이었다. 알차게 반절을 보내고 방구석에서는 배달음식어플을 켜고 저녁메뉴를 뒤적인다. 그렇게 고른 네팔음식, 호주에서 네팔부부와 살때 외식으로 사먹던 음식들로 나홀로 먹방을 찍었다. 카메라로 남길만한 비쥬얼은 못된게 배달음식이라 어쩔 수 없었다. 누군가와 네팔음식점을 가게된다면 인스타 ..

내가 봉사라니 24-11-17 간접 해외생활

내..내가 봉사라니 이보시오 일요일은 봉사하는 날, 오늘은 딱히 별 이슈는 없었다. 그저 오전에는 예전 중학생들에게 사회교과목을 알려주던 20대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오후에는 내가 호주에서 네팔부부와 같이 살면서 친하게 지냈던 시절의 정서로 돌아간다. 교원자격이 없어도 교육봉사자는 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주민에게 교육봉사를 할 기회가 생긴 우연함이 나름 일요일 하루를 보람차게 해주고 있다. 간접 해외생활인건, 나와는 다른 문화권의 친구들과 한국어로든 영어로든 그들의 문화권을 학습하고 나름 친분이 생기면서 뭔가 라포형성이 되는 기분이 재밌다. 다만 너무 과몰입은 경계해야 함은 교육은 빠르게 종결이 되며, 그 교육이 마무리가 되면 우리의 관계맺음도 종결된다. 그들이 더이상 찾아 오지 않을 것을 당연..

겟츠타고 Think out loud 듣던 외노자 시절

요즘 운동한다는 명분으로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거리를 걷지 않고 귀가를 하고 있다. 오늘은 특이하게 익숙한 비트가 들렸다. 다이나믹 듀오의 잔돈을 됐어요의 인트로가 나오면서 개리의 랩이 시작되었다. 여기까진 그저 잠깐 추억에 잠겼는데, 뒤이어 에드 시런의 Think out loud 가 나오더라. 내가 추억에 잠기는 팝은 호주 워홀러 시절, 외국인 근로자의 삶을 살던 와중에 듣던 노동요들이 그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우박맞아 찌그러진 골프공 같은 경차 겟츠가 처음이자 마지막 차다. 겟츠는 한국에서는 클릭이란 이름의 경차로 팔렸는데, 내가 탄 겟츠는 앞좌석만 차문이 있는 특징의 차량이었다. 같이 살던 친구에게 3000불을 주고 수동운전까지 배워서 타고 다녔던 추억의 차이다. 이 차는 앞서 말했듯 우박을 쳐..

교육봉사 5주차, 봉사로 교육을 하지만 학습자가 된 기분

2024년 11월 10일 일요일, 오늘도 교육봉사를 하러 가는 날이었다. 실질적인 교육봉사는 5주차, 2번의 교육과정 참관까지 하면 9월부터 시작된 2개월의 여정이다. 특별한 일이 있던 하루는 아니지만, 무엇인가 내 업보를 청산하는 하루하루 혹은 배우는 입장의 봉사자가 된 느낌을 보내는 시간인 것이 이주민 교육 봉사에 대한 감정이다. 내가 주로 마주하는 이주민은 힌두 문화권, 인도인이다. 그리고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 이주민 등이 많다. 아무래도 많은 이주민들이 이슬람이나 힌두문화권인 경우가 많긴 하다. 필리핀이나 베트남쪽은 아마 이주과정이 좀더 순탄해서 드문것으로 보인다. 결혼이나 직업적인 방법으로 영주권이 보장된 이주민들은 드물게 방문하지 않나 싶다. 물론 내가 좀더 오래 봉사를 한다면 보기도 하겠지..

이주민 봉사 4주차, 언제나 돌발 상황은 찾아온다

11월 3일 일요일, 오늘도 어울리지 않는 봉사활동을 위해 센터를 찾아가며 하루를 열였다. 오전에는 중졸검정고시 준비를 하는 친구를 가르치는 시간인데, 사회파트만 해주고 있다. 예전에도 중학교 사회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알바를 할 때, 역사만 좋아했던 나에게 다른 파트는 조금 부담이었다. 사회라서 그나마 덜 부담이 되긴 해도, 제일 못했던 지리를 가르치는 중이라 나름 준비를 했었다. 저번 시간에 가족캠프 간 줄 모르고 한주 건너 뛰고, 나름 예습을 해온 그 친구와 함께 공부를 해 나갔다. 나름 수업 중간중간 헛소리를 아재의 드립을 받아주는 친구를 보면서, 한국어 실력이 대단하구나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타국에서 적응하고 타국의 언어와 교육시스템에 적응한다는게 쉬운일은 아니다. 물론 어른..

사범대 중퇴출신, 이주민 교육봉사 002, 한글교육 그리고 검정고시과외?

저번 일요일에 두번째 한국어 교육 봉사를 진행했다. 토요일에 약속이 있어서 오전에 미사를 챙기고 방문했더니 시간이 약간은 촉박했다. 그래도 저번에 다섯명정도 왔으니 아마 적겠구나 싶어서 대충 유인물을 복사하고 3층에 올라갔다. 그런데 가보니 저번에 왔던 인도커플 2명에 시크교 가족 4식구, 그리고 찍먹하러온 파키스탄 커플에다가 중국인 친구까지 있었다. 패닉이 왔고, 일단 복사를 다시하러 내려가고 하다가 복사본을 잘못하고 말았다. 일단 수업을 겨우겨우 마치긴 했지만 정신없이 끝났다. 일단 힌두계열의 친구들은 한국어가 안되서 영어로 수업을 했지만, 중국인 친구는 중국어 외에는 아예 소통이 안됐다. 그래서 일단 힌두친구들 중심으로 수업을 하고, 구글번역기로 중국친구에게 한국어를 교육하는 식으로 할 수 밖에 없..

가벼운 봉사...를 할 생각이었는데...24-10-13

일요일에 하루정도, 아니 적당한 시간을 직접적인 봉사활동을 하는게 어떨까 생각해왔다. 주변에 요양원이 많아서, 내가 일했던 곳이 아닌 곳에서 방문봉사를 생각했지만, 여전히 코로나 여파로 방문봉사가 어려웠다. 소모임어플에서 봉사모임을 찾았지만, 봉사장소가 멀어 차량은 커녕 면허도 없는 상태라 자꾸 신세를 져가며 봉사하는것도 우습더라. 그래서 종종 찾아가는 성당 근처에 연계된 이주민을 돕는 센터를 찾아갔다. 혹시나 싶어서 이주민들 관련해서 봉사활동을 할만한 기회가 있는지 여쭸다. 아무래도 갑작스럽게 봉사하겠다고 했기에, 자리가 없을거 같아보였다. 전화를 드렸을 당시에도, 현재는 봉사인력을 필요로 하진 않아 한번 방문해서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뉘앙스였다. 그떄까지만 해도 나도 찍먹하는 마음이기도 해서, 봉사활동..

네팔부부와의 우연한, 그리고 소중한 만남의 시작

호주로 떠나면서 휴학 신청을 했다. 6학기, 3년이 지나면 제적이 된다는 조항을 읽고 내린 결정이었다. 떠나면서 나는 이제 진흙탕으로 간다고 어렴 풋이 느꼈다. 인터넷으로 검색만 해도 다 나오는 세상이다. 구글에 '호주 워홀의 현실', '호주이민의 실상' 등을 보면서 대충은 알았다. 그리고 친구가 먼저 퍼스에 가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던 경험담도 한몫했다. 그래서 딱히 기대에 부풀어 가진 않았다. 그저 사람들 눈을 피해 이방인으로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나는 이제 어디서 살더라도, 이방인으로 살게 되겠구나. 제주에 가도, 서울에 가도, 퍼스, 밴쿠버.. 어디서든 말이다. 결혼하지 못할 거 같다는 생각도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여기까지만 하고 일단 이야기를 진행한다. 초기 퍼스 정착은 친구의 도움..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