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2부 어머니 <이야기꾼>

p5kk1492 2024. 10. 12.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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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야기꾼

 

고담 마니아였던 나의 친

할머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두쇠였지만

조웅전, 대봉전, 충렬전,

옥루몽, 숙영낭자전

웬만한 고담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소

장하고 있었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

니는

이따금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

씨 불러다 놓고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 흐르듯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

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

음기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지금도

생생한 기억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맞

이하러 가던 날

점심은 물론이고 참외며

수박

기타 음식을 바리바리 장

만하여

마메다쿠시를 여러 대 불

러서 타고 떠났다

어머니는 택시비도 내지

않았고

아마 준비 없이 나만 데

리고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으로 모셔 간 셈

이다

 

구성진 입담에다가 비상

한 암기력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사교적 밑천이었던 것 같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

져도

노래 한 자리 할 줄 몰랐

춤을 추고 신명 낼 줄도

몰랐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농담 한마디 못하

는 숙맥이었다

아마 그러한 점을

조금은 내가 닮지 않았을

하는 생각이 든다

 

감상

나의 외할머니도 참 이야기꾼이셨다. 내용 자체는 별게 없는 남들의 뒷이야기정도지만, 아마 내가 외할머니를 좋아하고, 말하는 모습이나 나를 대하는 모습, 정겨움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도 이야기꾼은 못되지만, 광대처럼 주변사람들을 재밌게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결국 남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책을 읽고 지금 이 시를 읽는 느낌도 든다. 내 스스로의 기호와, 타자의 선호 사이에서의 선택이 지금의 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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