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이야기꾼
고담 마니아였던 나의 친
할머니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구두쇠였지만
조웅전, 대봉전, 충렬전,
옥루몽, 숙영낭자전
웬만한 고담 책은
돈 아끼지 않고 사서 소
장하고 있었다
글을 깨치지 못했던 할머
니는
이따금
유식한 이웃의 곰보 아저
씨 불러다 놓고
집안 식구들 모조리 방에
들라 하여
소위 낭독회를 열곤 했다
책 읽는 소리는 낭랑했고
물 흐르듯
듣는 사람들은 모두 숨을
죽인 채
그리하여 밤은 깊어만 갔
다
내 어머니도 글 모르는
까막눈이었지만
고담 마니아였을 뿐만 아
니라
책 내용을 줄줄 외는 녹
음기였다
어느 여름날인가 지금도
생생한 기억
동네 사람들이 모여 물맞
이하러 가던 날
점심은 물론이고 참외며
수박
기타 음식을 바리바리 장
만하여
마메다쿠시를 여러 대 불
러서 타고 떠났다
어머니는 택시비도 내지
않았고
아마 준비 없이 나만 데
리고 동행했다
그러니까
이야기꾼으로 모셔 간 셈
이다
구성진 입담에다가 비상
한 암기력
그것이 어머니에게는
사교적 밑천이었던 것 같
다
그러나 사람들과 어우러
져도
노래 한 자리 할 줄 몰랐
고
춤을 추고 신명 낼 줄도
몰랐고
술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심지어 농담 한마디 못하
는 숙맥이었다
아마 그러한 점을
조금은 내가 닮지 않았을
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상
나의 외할머니도 참 이야기꾼이셨다. 내용 자체는 별게 없는 남들의 뒷이야기정도지만, 아마 내가 외할머니를 좋아하고, 말하는 모습이나 나를 대하는 모습, 정겨움이 내 기억에 남아있다. 나도 이야기꾼은 못되지만, 광대처럼 주변사람들을 재밌게 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결국 남들과 어울리고 싶어서 책을 읽고 지금 이 시를 읽는 느낌도 든다. 내 스스로의 기호와, 타자의 선호 사이에서의 선택이 지금의 나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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