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이기

특별함에 대한 짧은 생각

p5kk1492 2024. 6. 12.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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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함에 대해 두가지 상황을 가정해봤다. 누군가 특별하다고 말했을 때, 너와 나 모두 각자 특별한 사람이기에 우리 모두는 고유의 특별함을 지녔으며, 고로 우리는 특별하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반면 다른 의미로 특별하다는 것은, 당신은 누군가 보다 우월한 면을 가졌기에 특별하가고 정의할 수도 있다. 전자는 좀더 광범위하게 고유의 특별함을 논하기에 이상적인 면이 있고, 후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면에 맞닿아있다.

 

누군가 나에게 특별하다고 표현했을 때, 전자와 후자중에 어떤 상황이 더 와닿을까? 전자의 경우, 아름답지만 너무 이상적인 느낌의 뉘앙스가 담긴 특별함이다. 너와 나 보두 각자 고유의 특별함이 있다고 말하면, 동화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 좋은 의미지만, 와닿기에는 너무 현실성이 떨어진다. 후자는 단순하면서 전달력이 확실하다. 내가 누군가보다 우월하다는 부분이 확실히 느껴진다면, 특별함은 현실감있게 다가오고 나의 특별함이 누군가에게 인정받은 기분도 든다. 결국 특별함은 상대보다 우월하다는 의미로 귀결되는 것일까.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Meritocracy, 능력주의를 기본으로한 사회체계를 갖추고 있다. 상대보다 능력적인 면에서 우월한 집단이 피라미드위에서 지위를 갖는다. 능력주의사회에서 특별함은 나의 우월성으로 보상을 두둑히 받게 해준다. 반면, 특별하지 않은 집단은 자신의 열등함으로 낮은 보상을 받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기분으로 살게 된다. 능력주의라는 종교적 교리체계가 만들어낸 특별함, 이 상황이 지금의 세상이기도 하다.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 대다수는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라 여기며 사는게 지속가능한 공동체인지 의문이다. 물론 세상은 한번도 너 와 나 모두가 특별한 존재라고 인정받고 살았던 적은 없다. 종교 경전이나 철학 서적 안에서는 논의된 주제이지만, 현실화 된 적은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며 건설된 사회주의국가들도 결국 공산주의 엘리트의 권력 독점과 부패로 얼룩진 패배로 끝났다. 모두가 특별할 수 있는 전자의 특별함은 실현될 수는 없는가. 아니 꿈꾸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인가.

 

적어도 전자의 특별함을 전달하는 메신저가 세상에 필요하다. 역사 속에서 항상 옳음을 전하는 메신저가 등장했었다.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이스라엘에서는 예수, 동양에서는 싯타르타와 공자등이 그러하다. 너와 나 각자의 특별함을 전하는 메신저, 그러나 우리가 사는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메신저도 능력주의 엘리트여야만 한다. 

 

마이클 센델이 능력주의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던질때, 그가 하버드 정치철학 교수가 아니라면 그가 메신저가 될 수 있을까. 그가 던지는 화두가 탁월한 식견임은 분명하지만, 비정규직 청소부의 신분이었다면 메시지는 파급력이 없었을 것이다. 특별함을 보편화 하고자 하더라도 결국 능력주의가 제시하는 특별함의 자격을 갖춘 엘리트가 스스로 다윗이 되어야 한다. 능력주의 엘리트가 던지는 돌멩이 정도는 되야 능력주의 사회라는 골리앗에게 생채기정도 낼 수 있다.

 

대중 민주주의가 진보하더라도 결집력을 만드는 데에는 결국 현 체제에서 인정하는 능력을 가진 엘리트들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다. 나쁜 현상이 아니다. 현 체제를 진보하게 만드는 것은 보수적인 사회에서 인정받은 리더의 결단이기에, 결국 특별함의 두 간극을 전환하는 것도 그 둘 사이에서 작용과 반작용을 거쳐 진보한다. 그렇게 우리 모두가 특별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