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발견은 스스로를 포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 장 폴 사르트르
"True discovery begins with the renunciation of the self."
— Jean-Paul Sartre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의 아포리즘을 빌렸다. 오늘 새벽의 묵주기도를 하면서 문득 떠올랐다. 나를 버려야 진정한 나를 찾을 수 있다란 방구석 아포리즘이. 그래서 내 생각의 결과 비슷한 구절을 챗지피티를 통해 찾아봤다. 일단은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는 구절은 내가 말하는 아포리즘과 통하는 구석이 있다. 그렇게 되면 오늘자 아포리즘이 종교적 협의로 해석될 여지가 있어서 사르트르의 아포리즘을 택했다.
에픽테토스: "너의 이익과 욕망을 버릴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
"You will gain true freedom when you renounce your interests and desires."
— Epictetus
나를 버리는 방법론이 스토아 철학, 에픽테토스의 아포리즘에서 찾을 수 있었다. 버린다는 것은 사적인 욕망을 버려야하고 거기서 자유를 느낄때 비로소 사르트르가 추구하는 실존적 삶에 다다를 수 있다. 내 이익과 욕망이 얽힌 자유롭지 못한 실존적 행위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어렵다. 그저 주변의 사물들과 다를바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Da-sein 에 대치되는 Das Mann 이 된다는 것, 물론 이것이 개돼지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
다른 이들을 대할 때는 봄 바람 처럼 하늘하게, 나를 다스릴 때는 서릿 바람과 같이 엄격하게 할때, 나는 나를 버릴 수 있다 믿는다. 조금은 맥락이 어긋나보이더라도 내가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어떻게든 내 안의 차오르는 노욕을 자제하려고 엄하게 꾸짖는다. 물론 개인적인 욕망이 없다고 부정하는게 아니다. 최대한 남에게는 관대할지라도 나에게는 배이상으로 엄하게 대할 뿐이다. 나도 계속 나자신의 과오를 봐주려고 한다. 그럴때마다 스스로를 짓밟곤 한다.
나에게 엄하다는 핑계로 남을 엄격하게 대하는 것도 실존적 관계맺음에 실패하고 나도 잃는다. 그것도 욕망의 발현이고 자유롭지 못한 삶이다. 결국 내가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를 견디지 못하기 발생하는 반작용이기도 하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어렵지만, 어쩌면 위의 세가지 합의점을 생각해보면 쉬울 수 있다. 길을 쉽지만 어디까지 견뎌나가는게 중요하다. 강한자는 오래 버티는 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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