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끄적이기

아재론 - 자기고백적 아재가 덜 꼰대스럽더라

p5kk1492 2025. 1. 19.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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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rough Hells repeated, we taste the bitterness that makes life's sweetness meaningful."

인생에서 지옥을 반복해서 겪다보면, 삶의 의미에서 달콤함을 씁쓸함에서도 맛볼 수 있다.

-Outcast Philosopher

 

꼰대들도 힘들다. 자신보다 어린사람 혹은 후배 직장 동료 앞에서 인생 선배 입장에서 조언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내가 본 꼰대들은 보통 자신의 성취나 지위를 두고, 가르치려드는 행동을 하는 경향성을 띈다. 나이가 든 어르신들이 다 그러는 것은 아니고, 꼰대로 살아가는 유형의 사람들이 그렇고, 안그러던 사람들도 술자리에선 꼰대적인 태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나같은 아재들은 그런 어른들의 말을 이해 받는 척, 경청하는 척 하면서 비위를 맞추면서 자랐다. 아마 그렇게 되어가는 아재들도 있을 거다. 그렇게 자라기에 나는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아서, 나에게는 꼰대스런 조언을 어린 친구들에게 해도 에토스가 없다. 꼰대가 조언이랍시고 떠들어도, 사회경제적 지위가 갖춰져야 설득력이 있다. 그말을 듣기 싫어도 듣게 만드는 힘이 에토스니까. 

 

내가 아재가 되기전에, 나름 괜찮은 어른들을 만난 경험이 있다. 공통점이라면, 진정성 있는 자기고백형 선배라는 점이었다. 꼰대들은 자신의 외피를 두껍게 만들어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약점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모습이 난 오히려 별로 매력적이지 않았다. 되려 자신의 취약성을 드러내면서 본인의 삶의 경험치와 조언을 건내주는 어른이 멋있었다. 자신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점수를 잘 주는 꼰대같은 정교수보다, 월160만원을 버는 시간강사 선생님이 더 존경스러웠다. 나에게는 후자의 선생님이 어른이었고, 닮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분이 독일에서의 생활과 한국에서 겪은 서사등이 나에게 많은 힘과 용기를 주었다. 나와 연락이 끊김 이후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어있었다. 잘 되서 좋았다. 대학생들에게 인문과 경영경제, 실제적인 인재를 만드는 활동을 구상한 어르신은, 사회적 부채의식을 취지라며 말했었다. 해당 활동을 구상한 어르신은 정치적인 콩고물을 얻어먹으러 다녔고, 그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 대부분은 의도에 맞게 학생들에게 큰 어른의 역할을 했었다.

 

자기고백적 서사가 어른들 입장에서도 자주 나타날 순 없다. 그들이 가진 사회경제적 지위가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사용하거나 술자리에서 항변하듯 터져나오기도 하고, 후배세대에 대한 미안함에서 머쓱하게 새어나오기도 한다. 의도적, 우발적, 은연중에 나오든 뭔지모를 진솔함이 좋긴 하다. 어떤 의도든 살아있는 말을 들은 기분이어서, 꼰대들이 그만큼 포장지로 감싼 듯한 말을 하는 경향을 띄기 때문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조언할만큼의 서사가 없는 인간이다. 누군가를 설득하려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논리의 삼요소가 필요하다. 논리적 근거를 갖추는 로고스, 청중의 감정을 건드는 파토스, 신뢰와 도덕성을 갖춘 에토스가 이에 해당한다. 나는 에토스가 결여되어있어서, 말을 삼간다. 아재에게 있어 신뢰는 돈과 지위에서 나오는데, 난 없다.

 

아재론인지 루저론인지 모르지만, 자기고백의 서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솔직할 수 있는 아재가 되려고 노력중이다. 나를 포장할 생각은 정말 추호도 하지 않는다. 어차피 쓰레기를 예쁜 포장지로 감싸봐야 악취는 숨길 수 없다. 꼰대들도 자신들에게 어떤 냄새가 나는지는 생각하고 말하는게 좋다. 앞에서 경청하고 있는 어린 친구들이 당신들의 말을 존중하는지, 돈과 지위때문에 코를 막고 듣는지는. 알면서 그러는것도 알고 있다. 그게 꼰대의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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