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나의 출생
나의 생년월일은
1926년 음력 10월 28일이다
한국 나이로 하자면
아버지가 18세 어머니는 22세에
나를 낳았다
가난했던 외가였지만
혼인한 지 사오 년이 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는 딸자식을 근심하여
이웃에 사는 도사
그러니까 축지법을 쓴다는
황당한 소문이 있는 도사에게
자식을 점지해 달라고
외할머니가 부탁하여
덤불을 올렸다는 것인데
그것이 영험으로 나타났던지
바람 잡아 나간 아버지가
섣달그믐날 난데없이 나타났고
어머니는,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두 눈이 눈깔사탕같이 파아랗고
몸이 하얀 용이 나타난 꿈
그것이 태몽이었다는 것이다
하여 어머니도 주위 사람도
아들이 태어날 것을 믿었다고 했다
고된 시집살이였던 그때
어머니는
어른들 저녁 차림을 하고 있던 참에
갑자기 산기가 있어
마침 그날 도정해다 놓은 쌀가마에서
쌀을 퍼 담고
친정으로 오자마자 나를 순산했으며
술시라던가 해시라던가
아무튼 초저녁이었다는 것이다
계집아이의 띠가
호랑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대낮도 아니고 새벽녘도 아니고
한참 호랑이가 용을 쓰는
초저녁이라
그 팔자가 셀 것을 말해 뭐 하냐
어릴 적에 나는
그 말을 종종 듣기도 했고
점쟁이는 팔자가 새니
후취로 시집보내라 그랬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이라 섭섭해한 적은 없었다고 했다
나를 낳고 젖몸살을 앓은 어머니가
젖꼭지를 아이에게 물릴 때마다
아파서 얼굴을 찡그리는 것을 본
나이 어린 신랑이
신통하게도
젖꼭지랑 젖병을 사 들고 왔더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아버지로부터 받은 애정인 셈이다
그러저러한 사연을 지니고
다른 아이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나는 세상에 떨어졌던 것이다
하나 사족을 달자면
용을 본 것이 태몽인데
공교롭게도
어머니의 이름이 용수였다
본명은 선이라 했으나
어릴 적에 죽은 바로 위의 오빠
그의 이름이 용수였고
어떻게 된 일인지
호적상으로 어머니가
물려받게 된 것이라 했다
땅문서 집문서의 소유주 이름은 물론
문패에도 어머니의 이름은
김용수였다
ㄴ 나의 출생과 어머니가 자신을 낳은 사연이 어우러진 시를 보며, 저마다의 사연이 있듯이 본인에게도 사연있는 출생을 시처럼 이야기꽃처럼 펼쳐놓으셨다. 개인적으로는 딱히 출생에 사연은 없다면 없고, 있다면 있다. 마지막의 용수이야긴 참 기가막힌 우연인지 운명인지 기묘하고 신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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