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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현실 같은 화면, 화면 같은 현실
허무의 심연 같은 눈동자
이제는 세상에 없네
삭풍도 벌판도 언덕배기도
없네
오지 마을 늙은 농부가
해걸음의 그림자로 남았는가
아아
옹달샘 목욕하는 새 한 마리
없네 찾아볼 수 없네
지상에 머리 박고 발바닥은 허공에서
돌고 도는 비보이의 묘기
봉람새같이 차려입은 여가수는
석양을 꿈꾸듯 눈 감으며 노래하고
가짜 대머리 치고 만지는 마빡이는
고달픈 인생살이 달래려 하는가
용무늬 꽃무늬 나비무늬 눈부신 의상
천근만근 같은 귀걸이 목걸이의 모델
힘과 애수와 개그의 풍요가
넘치고 넘쳐서 무대는 휘청거린다
하기는 그래, 다 먹고살기 위한 곡예사들
눈물이 난다
현실 같은 화면, 화면같은 현실
종잇장 같은 현실
풀 한 포기의 탄식도 없네
나비 한 마리 목 축일 이슬방울도 없네
불쌍한 가로수들 침묵하고
공산품 공장의 건조한 바람 바람
컨테이너 산적된 항구에 일몰이 오고
어디로 가는지 어디에서 흩어지는지
화면 같은 현실, 현실 같은 화면
아아
굶주림 같은 풍요로움이여
쓰레기 더미 같은 풍요로움이여
죽음에 이르는 풍요로움이여
눈물이 배어들 땅 한 치가 없네
감상
난해한 느낌의 시다. 현실감이 없는 듯한 풍경이 마치 화면 같은 현실, 그리고 현실 같은 화면으로 시의 내용을 끌어가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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