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그리고 흔적

박경리 시집, 1부 옛날의 그 집 <옛날의 그 집>

p5kk1492 2024. 9. 27. 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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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룻병에 걸린 대추나

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

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

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

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

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

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

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

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

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혼자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어쩌면 미지의 영역이기에 느끼는 감정이다. 나도 혼자살아본 경험이 있지만, 외부에서의 활동으로 관계맺음을 이어나갔다. 박경리 저자의 경우 삶 자체가 외로움이었고, 그  에너지는 작품에 대한 창작욕으로 승화했다. 시에서 언급되는 사마천은 궁형이라는 굴욕적인 처우, 자신을 아무도 지지해주지 않는 극한의 고립에서 사기라는 위대한 저작을 세상에 남겼다. 

 

인생에 굴곡진 삶이 준 절망이나 괴로움을 예술로 승화한 사람이 박경리 저자이다. 물론 재능도 있으니 일어난 일이다. 나처럼 평범하지만, 나름의 파도가 있는 인생을 지닌 사람은 어떤 형태로 삶의 고단함에 대한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낼까. 박경리씨 만큼의 작품은 아니더라도, 나도 무엇인가 토해낸 글이나 말이 흔적으로 의미있게 남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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