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누구에게 내 슬픔을 털어 놓을 것인가?
안톤체호프 단편집 중 다섯번째 작품인데, 지금까지는 제일 마음에 드는 이야기다. 마부인 요나 포타포프, 요나는 아들을 잃었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들어준 사람이 필요한 그는 손님에게 사연을 말하고 싶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장교도, 세 젊은이도 그냥 흘려 듣고 만다. 같은 마차꾼 청년도 듣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슬픈 사연을 들어주길 갈구한다. 그게 여자였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그런 그에게 먹이를 먹고 있는 말이 눈에 띈다. 그렇게 그는 말의 옆에 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며 이야기가 마무리된다.
누군가에게는 비극이지만, 세상에 마부는 투명인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마부여서가 아니라 요나자체가 투명인간이다. 같은 동료라고 볼 수 있는 청년도 그를 무시한채 잠을 청하기 바쁘다. 마부의 생은 손님에게도 동료에게도 무시당한다. 말못하는 짐승 옆에서 아들의 죽음에 대한 사연을 토해내는 결말은 흥미롭다.
슬픔이란게 사실 원초적으로는 비공감에 영역일지도 모른다. 정말 같은 슬픔을 겪은 이들끼리는 어느정도 통할 수 있지만, 근원적으로 파고들어가면 남얘기다. 내얘기가 아니면 사람은 결국 완벽한 공감에 이를 수 없다. 온전히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국 내 슬픔을 털어놓는 것은 말못하는 짐승, 다시 말하면 나 자신에게 토해냄으로서 슬픔을 털어내는 수밖에 없다.
물론 적당한 범주 안에선 서로 슬픈 사연을 공유하고 공감하면서 아픔을 치유하는게 맞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파고드는 행위다. 자신이 가진 슬픔의 심연까지 닿는다면, 그 마주한 심연은 결국 자신과 마주한 나와 내 슬픔만이 남는다. 조금 기괴한 결말로 가는 기분이 들지만, 결국 내 슬픔은 내가 털어야한다. 누구도 내 슬픔에 대해서, 내가 겪은 비극에 대해 완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다. 왜냐면 내가 겪은 일은 오로지 1인칭의 나 뿐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사연임에도 특수성을 띈 서사가 되는 이유는 바로 '내가 겪은 슬픔'이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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